“장병 부모 편지 한 통 17년 군포교 큰 힘 됐어요!”

▲ 이성강 포교사는 쉼터 같은 군법당을 만들어야 장병들이 편하게 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 사람의 원력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 사람은 환경이 척박한 곳에서 현재의 삶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혼자만의 힘으로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기 쉽지 않지만, 이렇게 묵묵하게 한 길을 가는 이들이 종종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것을 하나씩 이뤄, 마침내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한다.

누나 권유로 불교 입문

젊은 시절, 이런 저런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의 쓴 맛을 보고 방황을 하던 이가 있었다. 그는 사업 실패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여 고통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누나는 불교대학에 보내 사람을 만들고 싶어 했지만, 동생은 관심이 없었다. 그의 누나는 신심 두터운 불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는 그에게 “불교를 알면 욕심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생활이 즐겁다”며 불교에 입문할 것을 재차 권했다.

한결같은 누나의 권유를 뿌리칠 수가 없었던 그는 금산사에서 운영하는 화엄불교대학에 입학, 불교공부를 시작했다. 불교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틈나는대로 사찰에도 다녔다. 불교대학을 졸업한 후에야 누나의 말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그는 누나를 스승으로 여긴다.

우여곡절 끝에 불교에 입문했고, 조계종 포교사가 된 뒤 지금까지 17년 간 군포교 등 불교 일에만 매달리고 있는 그, 전북 전주 6탄약창 군법당인 호국 장영사의 터줏대감 이성강(67) 포교사다. 그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불교 일꾼이다. 그런 그의 이름이 서울까지 오르내리게 된 건 은정불교문화진흥원에서 매년 개최하는 ‘나란다축제’ 영향이다. 장영사 법당을 찾는 장병들을 나란다축제에 참가시켜 꾸준한 입상 성적을 냈다. 2011년 처음 참가해 4명이, 2012년에는 17명, 2013년에는 대상을 포함해 43명, 2014년에는 최우수상을 포함해 23명이 입상했다. 올해는 개인 대상 등 31명이 입상했고, 단체 부문 대상을 차지할 정도로 장영사 장병들의 불교교리 실력은 뛰어나다.

교리대회 입상자 중에는 타 종교인도 있었다. 장려상을 받은 한 장병은 군법당에 다니는 동료장병으로부터 “법사님은 종교를 강요 안한다”는 말을 듣고 장영사에 왔고, 나란다축제 교리경시대회에 참가해 상을 받은 뒤 군종병 보직을 맡다가 제대했다. 올해도 특이한 사례가 있었다. 전역을 며칠 앞둔 장병이 말년 휴가 중에 동료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9월 6일 치러진 나란다축제 참가해 시험을 봤다. 이성강 포교사는 “자기가 시험을 안보면 다른 장병들이 시험을 치르지 않을 것 같아서 참가했다는 말을 듣고,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소회를 털어놨다.

그는 나란다축제에 참가하기 이전부터 불교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불교입문〉에서 꼭 필요한 내용만 간추린 자료집과 여러 불교 서적에서 내용을 뽑아 500문제로 구성한 불교상식집을 제작해 장병들에게 나눠주고 교리공부를 지도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장병들에게 불교를 재미있고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불교상식집은 그 결과물이다.

처음에는 초파일 때 자체적으로 치른 교리경시대회에 대비해 교리를 조금씩 가르쳤다. 장병들이 불교공부에 심취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문제를 맞히면 108염주나 호신불을 줬다. 그것도 한두 번. 장병들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간식 등 먹거리를 상품으로 주는 거였다. 나름 효과가 있었다. 장병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이성강 포교사는 “공부를 시키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법당 분위기가 좋아졌다”며 “법문은 10분만 한다. 내용도 〈법구경〉이나 〈백유경〉의 내용을 현실에 빗대, 우리가 어떻게 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한다”고 말했다. 

장병 눈높이 맞춰 교육

이 포교사는 법문 후에 장병들과 교리공부를 한다. 졸던 장병들도 교리공부 시간에는 눈을 번쩍 뜬다고 한다. 그가 장병들에게 불교교리를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알려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전역 후에도 사찰에 가서 예법에 맞게 참배할 수 있도록 사찰예절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다. 사회에 나가 종교를 선택할 때 불자가 될 확률이 조금은 높아진다는 생각에서다.

이성강 포교사가 호국 장영사와 인연을 맺게 된 건 화엄불교대학 총무를 맡고 있을 때였다. 도반들과 어느 곳에서 포교를 할지를 고민하다가 장영사 법회를 진행할 사람이 없어서 맡은 게 계기가 됐다. 처음엔 도반들과 한 주씩 맡아서 하다가 나중엔 혼자 도맡게 됐다.

이 포교사의 노력으로 천장에 비가 새고 바람이 들어오던 낡은 건물을 허물고 2002년에 벽돌로 지은 50평 규모의 새 법당이 완공됐다. 이 포교사가 처음 법당에 갔을 때만 해도 군법당을 찾는 장병은 17명이었다. 당시 성당이나 교회에는 150명의 장병이 몰릴 때였다. 17년이 지난 지금 법당에는 평균 100~120명의 장병이 법회를 보러 오고, 많이 나올 때는 150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는 10년 전부터 장영사에서 교리대회와 반야심경 독송 대회를 열고 있다. 특히 14년 전부터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연등제를 열고 있다. 이 행사는 장영사만의 행사가 아니라 6탄약창의 가장 큰 공식행사가 됐다. 연등을 1000개쯤 다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대인지 사찰인지 분간을 하지 못할 정도라고. 이 연등제는 7년 전부터 전라북도 봉축위위원회의 공식행사가 됐다.

연등제에는 부대장을 비롯한 전 간부가 다 참여한다. 연등법회, 교리대회, 부모님께 편지쓰기 대회 등 각종 행사가 열린다. 부대에서 휴가증 10장 받아서 노래자랑, 편지쓰기, 반야심경 독송, 교리대회 수상자에게 지급한다. 편지쓰기는 장영사의 오랜 전통이다. 이성강 포교사는 이 편지들을 모아놓고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책으로 엮을 생각이다.

그가 1년 동안 장영사에 가는 횟수는 60여회. 매주 빠지지 않고 가도 1년이면 52주다. 거기에 2개월에 한 번씩 열리는 안전기원법회와 특별행사를 합치면 총 60여 회가 된다. 지역 불교계 스님들과 불자들로부터 ‘장영사 주지’로 불릴 정도로 그의 입지는 확고하다. 

주위 도움으로 군포교 매진

주위에서는 솔선수범하는 그를 배울 점이 많은 사람으로 평한다.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그를 도와 10년 간 함께 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없는 그의 발이 되어 준 강석준 전북포교사단 사무국장과 이원일 금산사 사무국장이 그들이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도반들이 있었기에 묵묵히 군포교를 할 수 있었다.

군포교를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다. ‘후원금을 많이 받아 착복하지 않았나’하는 의심을 받기도 했고,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고도 자기 공으로만 돌린다’는 등의 말을 듣기도 했다. 그때 그는 군포교를 그만두고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부산에서 한 불자가 보내 온 격려 편지였다.

어느 날 장영사에 갔는데 군종병이 택배 온 게 있다고 해서 뜯어봤다. 부산에서 온 거였다. 편지 한 장과 초콜릿, 양초 몇 개가 있었다. 편지에는 “아들을 군대 보내놓고 먹고 살기 힘들어서 면회를 한 번도 못갔다. 아들이 법당 잘 다니고 있다고 하더라. 법사님이 주신 선물(호신불)도 잘 받았다. 어느덧 제대할 때 다 됐는데, 조금이나마 보답코자 간식거리를 보낸다. 병사들과 나눠 드시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통째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 얼굴도 모르는 불자가 편지와 간식거리를 보내주며 격려하는데, 밖에서 쓸데없는 말 들었다고 법회를 안보겠다고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때 이후로 그는 그만둬야겠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이성강 포교사는 “그 불자님이 아니었다면 군포교를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힘들 때마다 그 편지를 생각한다. 그런 마음 갖고 계신 분이 있어 큰 힘이 되고 있다”고 가슴에 묻어뒀던 말을 꺼냈다.

이 포교사는 2001년부터 2014년 말까지 15년 간 금산사복지원 보리수마을 관장을 맡아 지역 어르신들의 일거리를 찾아주는 일을 했다. 사찰에서 쌀을 화주 받아 어르신들의 점심을 해주는 등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 했다. 이 또한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것도 ‘불교 일’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보리수마을은 지역에서 가장 성공한 노인일자리사업장으로 성장했다. 그 공로로 지난해 완주 송광사 송년법회에서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보리수마을 관장을 하면서 받은 월급으로 아들에게 용돈 10만 원을 줘본 일이 없다. 생활비를 많이 준 적도 없다. 가족의 생계는 딸이 직장을 다니면서 해결했다. 그는 월급의 대부분을 군법당에 썼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원망을 들을 법도 하지만, 가족들은 그가 돈을 헛되이 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하고 싶은 거 하시고 아프지만 마세요”라고 한단다. 

쉼터 같은 법당 조성이 꿈

그는 군포교에 17년 간 매달렸지만,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매주 군법당에 드는 비용은 평균 40만 원 수준. 적지 않은 금액이다. 자식들이 주는 용돈, 사찰과 불자들의 후원금을 모아 충당한다. 그리고 쓸데없는 데 돈을 쓰지 않는다. 돈이 있어야 법당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매주 군법당에 다녀오면 다음 주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는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쉼터 같은 법당을 만들고 싶다’는 이성강 포교사. 그는 몇 번의 고난을 헤쳐 나온 뚝심과 20대 못지 않은 뜨거운 열정을 가진,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생활이 어렵고 힘들면서도 자신을 지지하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아직은 견딜만하다는 이성강 포교사는 힘들다고 짜증내는 자신이 부끄러울 때가 많다고 한다. 힘들 때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그의 삶은 가느다란 몸에서 맑고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는 향(香)과 닮았다.

그는 군포교 등 불교 일 이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 본적이 없는, ‘불교만 아는’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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