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지른 일의 과보를 스스로 받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미래의 좋고 나쁨은 모두 자기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업’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업에 대해 어떠한 가르침을 주셨을까요? 편집자

지혜 있는 이가 업을 관찰하고는, 다음에 업의 인을 관찰하나니, 업의 인은 무명과 촉이니, 무명과 촉으로 인하여 중생이 유(有)를 구하고, 유를 구하는 인연이 곧 애(愛)니라. 애의 인연으로 몸ㆍ입ㆍ뜻의 세 가지 업을 짓느니라.
 〈대반열반경〉

만약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받기도 하고 후세에서 받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부러 짓는 업이 아니면 나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아함경〉

이미 지은 착하지 않은 업은 마침내 온갖 괴로움 받네. 그 업을 지을 때엔 기뻐했으나 마침내 울면서 그 갚음 받네. 온갖 착한 업 지은 그 사람 마침내 괴롭게 번민하지 않나니, 기뻐하며 그 업을 짓더니 편하고 즐겁게 그 갚음 받네.
 〈잡아함경〉

선업은 마치 부모와 같아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가고 악업은 마치 큰 원수와 같아 지옥이나 아귀, 축생 등의 세계로 끌고 간다. 그러므로 선업을 닦고 악업을 버려야 한다.
 〈정법염처경〉

지난 세상의 업을 피할만한 곳은 산도 아니요, 바닷속도 아니며, 땅에도 그럴만한 곳이 없고 하늘에도 있지 않다. 그림자가 사람을 따라가듯이 편안히 살 자가 없고 선악의 업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악을 행하여 악의 결박 받건만 악을 행하고도 깨닫지 못하다가 죄가 닥쳐서야 닥친 줄 알고 죄를 받고야 죄의 근원을 안다. 마치 쇠에서 더러운 때(녹)가 생겨 도리어 그 몸을 먹는 것처럼 그 마음에서 악이 생기어 도리어 그 몸을 패망시킨다.
 〈법집요송경〉

“또 어떤 업이 중생으로 하여금 지옥에 태어났다가 곧 목숨을 마치게 합니까?”

“어떤 중생은 그런 업을 짓고는 초조해하며 ‘인과가 없다’고 말한 것을 뉘우쳐 번뇌의 날카로운 칼날을 버려 멀리 여의고는 ‘이것은 사랑하고 즐길 것이 아니다. 나는 다시는 짓지 않으리라’라고 한다.

그것은 마치 저 아사세왕이 아버지를 죽인 죄를 짓고는 참회하고 드러내어 ‘나는 악업을 지었으니 마땅히 스스로 받아야 한다’ 하고 부처를 향하여 참회하고 지난 잘못을 자세히 말하였을 때, 부처가 그를 가엾이 여겨 죄의 성품을 관찰하게 한 것과 같다. 죄는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있는 것이라 끝내 잡을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중생은 지옥에 태어났다가 곧 목숨을 마쳤느니라.”
 〈불설분별선악보응경〉

동자야, 저것을 왜 업청정(業淸淨)이라고 하는가? 삼유(三有)에 나타나 보이는 것이 마치 꿈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나니 저것들에 대하여 싫어하여 여의고 탐애를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을 업청정이라고 하느니라.
 〈월등삼매경〉

만일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해야 한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의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 노력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과거에 지은 바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렇게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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