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째 국내외 봉사활동
“의료봉사로 삶 회향하고 싶어요!”

개인 능력 살린 봉사활동 ‘행복’
불자의료인 참여 저조 아쉬워

▲ '자신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어 감사하다'는 이연희 팀장. 그의 고마운 마음이 사바세계를 향기롭게 하는 법향(法香)처럼 널리 전해지길 바란다.

“응급환자입니다! 도와주세요!”

아직 해가 밝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녘, 라오스의 한 마을에서 해외의료봉사를 펼치고 있던 불자의료봉사단 ‘반갑다연우야’와 전국병원불자연합회의 숙소에 도움을 요청하는 긴박한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각각 18살과 20살의 앳된 만삭 임산부였다. 시골마을이라 변변한 의료시설도 없고, 있다 하더라도 의료비를 낼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해 한국의료봉사단 방문 소식을 듣고 급히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의료봉사 개시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대부분의 의료진이 다른 곳에서 쉬고 있었고, 이번 봉사에는 산부인과가 참여하지 않아 관련 전문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가장 먼저 도움 요청을 확인한 봉사단원이 숙소 문을 두드리며 외과전문의를 찾았다.

“외과의사분들은 밖으로 모여주세요. 응급 산모입니다!”

외침을 들은 봉사단원들이 부랴부랴 숙소 밖으로 달려 나왔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급한 대로 외과전문의가 수술장갑을 손에 꼈다. 치과간호사로 봉사에 참여한 이연희 씨도 옆에서 분만 보조를 하게 됐다. 다행히 봉사단원 중에 산부인과 간호사가 있어 수월하게 분만을 도울 수 있었다. 이날 산모들은 건강한 아들과 딸을 얻었다.

“레지던트 때 이후로 분만은 처음이네요.” 분만을 마친 뒤 외과전문의가 땀을 훔치며 말했다. 분만을 도운 이연희 씨도 그 말에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직접 아이를 낳아봤음에도 이토록 적나라한 광경은 처음이어서 황망했던 순간을 돌이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분만과정에서 남은 태는 비닐봉지에 담아 산모 가족에게 전달했다. 분만이 끝난 산모는 주사 한 대를 맞은 뒤 얇은 요를 몸에 두른 채 아이와 함께 덜컹거리는 수레에 올랐다. 섭씨 40도를 육박하는 더운 날씨를 뚫고 산모와 가족들은 그렇게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본 이연희 씨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 봉사단원들이 너나할 것 없이 “조금씩 돈을 모아 주자”고 의견을 냈다. 그러자 라오스 사찰과 해외의료봉사를 연계하는 데 도움을 준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측은하게 생각한다거나 동정심을 내선 안 됩니다. 단순히 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했다는 마음만 가지세요.”

간호사 일하며 불교 인연

불자의료봉사단 반갑다연우야에서 10여 년 째 활동하고 있는 이연희(63) 치과팀장. 그는 몇 년 전, 라오스에서 해외의료봉사를 하면서 겪은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의 노력이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됐기에 뿌듯함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의료 환경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봉사단원들이 아상(我相)을 깨고, 무주상보시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스님의 따끔한 가르침도 잊지 않고 있다. 물론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더라도 동정해선 안 되는 것이 라오스의 문화이기도 했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

이 씨는 오랜 세월 치과간호사로 일했지만 학창시절에는 특별한 장래희망이 없었다. 때문에 주위 친구들이 졸업 후 어떤 일을 할지 고민을 말할 때도 딱히 할 얘기가 없었다. 그런데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병원 사무를 한번 맡아보라’는 권유가 들어왔다. 이 씨는 잠시 경험이나 쌓아보자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애초에 간호사를 할 생각은 없었어요. 관련 자격증도 없었으니까요. 단순히 친구 어머니께서 유명한 치과병원장이셔서 사무를 보러 갔던 것뿐이었거든요. 한 3일 정도 일해보고 더 좋은 직장을 구해서 나가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근데 그게 평생 직업이 됐네요(웃음). 병원에서 일하면서 간호사 자격증도 땄고요.”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게 된 치과간호사. 이 우연은 곧 불교와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이 씨가 일하는 치과병원이 입소문을 탔는지 한국불교계의 내로라하는 스님들이 잇달아 방문했다. 조계종 제3ㆍ4대 종정을 역임한 고암 스님을 비롯해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 자운 스님, 조계종 제32대 총무원장 지관 스님,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 등 수많은 스님들이 병원을 다녀갔다. 당시 이 씨는 불교를 잘 알지 못했던 터라 단순히 ‘큰스님들이신가보다’ 생각하고 말았다.

이 씨는 성장기 때만 해도 종교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모친이 사찰에 다니며 신행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에게 불교는 ‘어머니의 종교’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이 씨가 20대 초반 당시 모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불교를 떠올리게 됐다. 특히 맏이로서 ‘제사를 사찰에서 지내면 어머니께서 좋아하시지 않을까?’하는 고민을 했다.

“어머니 제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자운 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그러면 내 따라와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매년 정릉 보국사에서 제사를 올리고, 신행생활도 하게 됐죠. 스님께서 ‘대불화(大佛華)’라는 법명을 주셨어요. 그러면서 저를 ‘대불~, 대불~’하고 부르셨죠.”

‘지금 아니면 봉사 못 해’

이 씨는 치과병원에서 일을 했지만 의료봉사라는 것이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기독교신자인 지인들이 의료봉사를 함께 가자고 권유했을 때 ‘그런 게 있느냐’며 되물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불자였기 때문에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불교계에서 의료봉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알아봤다. 이후 연꽃마을에서 봉사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가 봉사를 시작했다.

“30대 중반 정도 됐을 때 문득 의료봉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서 무의식적으로 보살행ㆍ회향 등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네요. 처음에 세 살배기 어린 딸을 데리고 연꽃마을에 가서 봉사를 했어요. 하루 종일 주사를 놓기도 하고, 할 수 있는 의료봉사를 다 했는데 딸이 그러더라고요. ‘엄마 오늘 돈 많이 벌었으니까 맛있는 거 사줘’라고 말이에요. 그래서 돈을 받고 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하면서도 ‘불교계에 의료봉사가 활발해졌으면 좋겠다’싶었어요.”

그렇게 수년간 연꽃마을과 승가원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이 씨는 자식 뒷바라지에 힘을 쏟으면서 조금씩 봉사와 멀어졌다. 특히 혼자서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체계적이지 못해 느슨해지는 것을 많이 느꼈다. 이런 그가 다시 봉사활동에 나선 것은 50대에 접어들면서부터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느 사찰에 기도를 하러 갔다가 ‘반갑다연우야 의료봉사자 모집’ 현수막을 봤어요. 창단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을 때였는데 조계종 중앙신도회 산하에 이런 단체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죠. 그때 치과전용버스가 생겨서 홍보하기에 봉사자로 등록했어요. 조직적으로 봉사활동을 해보니 확실히 혼자 할 때보다 보람차고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이 씨는 ‘반갑다연우야’에 몸을 담은 뒤부터 한 달에 한두 번씩 시간을 내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대부분 지역 사찰의 장소협조를 얻어 진료를 하는데 봉사단을 찾아오는 사람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폭 넓다. 주로 당일 치료할 수 있는 발치나 스케일링, 진료상담 등의 봉사를 제공하는데 많을 때는 하루에 70~80명의 진료를 맡을 만큼 호응이 크다.

불자의료인 참여 확대되길

“관세음보살의 화신이 아니고는 이렇게까지 정성들여 봉사를 해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씨가 해외의료봉사를 하면서 들은 감사의 인사 중 잊지 못하는 표현이다. 국내보다 해외의료봉사에서는 현지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중증환자를 자주 만나게 된다. 더구나 제한된 장비만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야하기 때문에 진료 난이도도 높다. 하지만 이런 노력 덕분에 환자는 새 삶을 받은 것처럼 감사해 한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노력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아 불교계 의료봉사단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많고, ‘해봐야 얼마나 열심히 하겠느냐’는 편견을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곧 불자의료인들의 저조한 참여로 이어지기도 했다.

“함께 해외의료봉사를 가는 스님들도 놀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솔직히 설렁설렁하다가 돌아오는 줄 알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근데 현장에서 같이 봉사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어요. 앞으로 많은 불자의료인들이 동참해서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데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지역 사찰에 가보면 신행생활 하는 불자의료인들은 꽤 있지만 의료봉사단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기독교계 의료봉사단의 경우에는 들어가고 싶어도 자리가 없어서 들어가지 못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거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게 얼마나 큰 능력이고 행복인데요.”

이 씨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힘닿는 데까지 봉사를 이어갈 계획이다. 매일 〈천수경〉과 〈금강경〉을 독경하며 늦게나마 매진하게 된 의료봉사를 통해 삶을 회향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봉사를 빠지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막상 봉사하러 가면 즐겁고 힘이 난다”고 말하는 이연희 팀장.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국 의료기술이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 열악한 환경에 처한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의 손길로 뻗어나가길 기대한다.

▲ 봉사단을 찾아온 환자를 돌보고 있는 이연희 씨.
▲ 2013년 미얀마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는 '반갑다연우야' 봉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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