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몸이란 해탈을 위한 도구로 정의됩니다. 다시 말해 몸은 구원론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학대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왕위(王位)를 버리고 카필라 궁을 탈출해 처음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을 땐 자신의 몸을 극단적으로 내던지는 고행(苦行)의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고행이 궁극적인 깨달음을 안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도(中道)와 사유(思惟)는 부처의 길로 안내한 수행방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몸은 어떤 가치를 갖게 되었을까요? 인도의 고대철학에 따르면 두 가지의 특징을 갖는다고 합니다. 첫째, 몸은 단지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도 포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몸은 세계와 부딪히는 물질적 육체와 더불어 세계를 감지하고 향유하는 정신 기능도 함께 한다는 입장입니다. 둘째는 몸은 업(業)과 윤회(輪廻)가 적용되는 당체(當體)입니다. 몸이 있으므로 업이 있고, 업이 있으므로 몸이 있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몸은 바꿔 말해서 업을 없애고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에 해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선 이러한 몸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경계합니다. 물론 몸을 지나치게 편안히 하려 하거나, 치장하거나, 쾌락에 물들게 하는 것도 엄중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만 중생들의 몸이란 업과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도구로써 소중히 간직하되 그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음식과 휴식을 권장하는 게 불교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이러한 가르침과는 달리 몸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현대사회에 이르러 외모지상주의 바람이 불면서 몸이 단순한 신체로 전락하게 되고 병원에 의탁하는 경우가 더욱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욱이 다양한 외모 가꾸기를 통해 성형이나 지방흡입술을 시도했다가 부작용으로 인해 자살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어 사회적 문제로도 비화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 사회의 전문가들은 이렇듯 성형과 다이어트 등에 집착하는 것을 ‘병’이라고 진단합니다. 멀쩡한 몸을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변형시키고 그 후유증마저 심각하게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상을 일종의 정신병, 즉 ‘신체변형장애’로 진단합니다. 

몸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마음까지 덩달아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몸을 단순히 외모 가꾸기의 희생으로 만들어선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건강한 몸을 유지해야 합니다. 평범한 미식축구코치에서 4년 만에 백만장자 사업가로 변신한 아트 윌리엄스는 건강한 몸과 정신이 그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뚝심과 주눅 들지 않는 패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습니다. 아트 윌리엄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가 어느 해 카리브 해의 작은 섬에서 해변을 걷다가 한 어부를 만났습니다. 그는 어부에게 미래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어부가 말했습니다.

“매일매일 일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서 고기를 더 잡는 것입니다. 그 고기를 시장에 팔아서 충분히 돈을 모으면 작은 배를 사서 더 넓은 바다로 나가 고기를 더 많이 잡을 것입니다. 그러면 더 큰 배를 살 수가 있겠죠. 그 배를 아들에게 줄 겁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는 배를 여러 척 가지게 될 거고 더 많이 일할 수 있게 되겠죠.”

어부는 건강한 몸이 바탕이 되기 때문에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확고한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아무리 뜻이 가상하다고 해도 일의 진척을 이룰 수 없습니다.

〈백유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이 있었습니다. 한 해는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궁해졌습니다. 그들은 흉년이 들지 않은 이웃나라로 옮겨가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도중에 험한 산을 넘게 되었는데 그 산은 예로부터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 더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잠자리를 펴게 되었습니다. 날씨가 추워 모닥불을 피웠지만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한 악사가 연주할 때 쓰는 나찰의 옷을 보따리에서 꺼내 입었습니다. 일행 중의 한 명이 잠결에 소변이 마려워 잠을 깼는데 모닥불 옆에 나찰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도 비명 소리에 놀라 모두들 일어나 도망쳤습니다. 나찰 옷을 입고 있던 악사도 덩달아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일행들은 나찰이 쫓아오자 죽어라 하고 뛰었습니다. 날이 밝아올 무렵 기진맥진 도망치던 일행들은 그제야 동료가 나찰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뚜렷한 주관이 없이 사는, 자화상을 잃고 사는 현대인들을 풍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화상을 잃고 사는 삶이란 깨달음이 없는 삶과 진배 없습니다. 그런 삶에서의 몸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자신의 몸을 지금이라도 한 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몸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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