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커서 덕이 크고 고개 높아 삶의 가치를 보네

▲ 백두대간을 알리는 돌비석이 서 있는 육십령 정상의 동쪽.

도적떼 많아 60명이 함께 넘던 고개
동쪽 식당 산꾼들 사이 소문난 쉼터
서쪽 휴게소 호텔출신 주방장 유명
논개 생가지 둘러보며 새로운 역사인식


“신라 때부터 요해지였으니, 행인이 이곳에 이르면 늘 도적에게 약탈당하므로 반드시 60명이 되어야만 지나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육십령(六十嶺 734m)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산이 험하고 고개가 높으면 도적이 많은 것은 흔한 일이지만, 들머리에서 60여 명이나 패를 지어 고개를 넘어야 했다니 그 험한 지경을 설명하고도 남습니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고 주변에 여러 고갯길과 협곡을 거느린 육십령도 시대의 변화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육십령은 자동차로 훌쩍 넘어 가는 옛 고개일 뿐입니다. 더구나 대전통영고속도로의 터널이 남덕유의 너른 품을 관통해 버리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 넘지 않으면 올라 설 일도 없는 고갯길입니다. 그나마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지나는 곳이어서 등산객들에게 중요한 들머리나 날머리 역할을 하고 자전거나 오토바이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고갯마루의 서쪽은 전북 장수군 장계면으로 전라도 땅이고 동쪽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으로 경상도 땅입니다. 고개 정상부의 동쪽에는 오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상남리라는 이름보다는 육십령 마을로 더 잘 통합니다. 이 마을에는 10여 호의 민가가 나름 번듯한 형세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이 고갯마루에 풍족한 농사가 있어서는 아니고 산에 기대 평생을 알뜰하게 살아 온 덕분에 대문 달린 집을 지었을 것입니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건너편 너른 주차장에 자리한 육십령식당으로 들어서니 부엌에서 일 하던 안주인이 무심한 듯하면서도 온기가 넘치는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 하며 반겨줍니다. 이 식당의 안주인은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꾼들에게 상당히 인기 있는 조정자(60) 씨입니다. 10여 년 전 이곳에 식당을 시작하고부터 산꾼들에게 인심 넘치게 밥을 해주며 입소문이 나 잡지에 기사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이력을 말해주듯 벽에는 많은 산행표식 리본들이 걸려 있습니다. 그만큼 이 식당을 들러 간 산꾼이 많다는 얘기고 또 그만큼 이 식당의 인심이 넘친다는 반증이겠습니다. 좀 확대 해석하자면 이 식당의 안주인이야말로 덕유산이라는 이름의 넉넉한 이미지를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긴 세월 궁벽했을 육십령 고개지만, 오늘의 고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육십령 식당이 산꾼들에게 인기 있는 쉼터라면 그 너머 전라도 쪽 고갯마루의 육십령휴게소는 전혀 다른 이미지입니다.

육십령식당 조정자 씨가 내는 식사 메뉴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돼지두루치기 등 집밥에 근거를 둔 음식들입니다. 그러나 전라도 쪽 육십령휴게소는 의외로 양식입니다. 메뉴도 딱 두 종류 스파게티와 돈까스 뿐입니다. 그래도 이 휴게소의 명성은 전국적입니다. 주말에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한참 기다려야 음식 맛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 휴게소의 주인은 조철(55)·김성숙(53) 부부입니다. 그는 ‘쉐라톤 워커힐 호텔’, ‘그랜드 힐튼 호텔’ 등 유명호텔에서 일을 하다가 귀농을 꿈꾸며 5년 전 전북 진안으로 내려 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공개입찰로 육십령휴게소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지역 농산물을 활용하고 욕심 없이 정해진 시간, 가능한 수량만큼만 요리를 하는 소신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능과 선의의 소신에 가슴이 뻥 뚫리는 풍경과 신선한 공기까지 곁들여져 휴게소의 양식 메뉴는 이 지역의 새로운 명물이 된 것입니다.

주차장 가에 지어진 전망대에 올라 멀리 풍경을 조망합니다. 높은 곳에서 멀리 눈길을 주는 일은 행복합니다. 늘 가까운 것만 보며 살다가 아득한 하늘 밖을 바라보는 여유는 가슴 속의 멍울을 씻어주는 청량제인 것입니다. 멀리 산마루를 바라보며 우물 안 개구리가 너른 바다를 알지 못하고 여름 벌레가 얼음을 알지 못하는 도리를 생각해 봅니다. 산의 품이 얼마나 너르고 그윽하면 덕유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덕유산의 그 넉넉한 덕성을 닮아가는 삶을 다짐해 보게도 됩니다.

육십령의 이쪽과 저쪽은 차이가 없습니다. 양식과 한식의 차이라든가 경상도와 전라도의 차이라든가 하는 것은 잠시의 인연으로 지어진 이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산은 스스로 동서를 구분하지 않았고 길 또한 스스로 이름을 짓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사람의 편리를 위해 지어진 이름일 뿐인데, 우리는 그것에 집착하여 높고 낮음을 따지고 멀고 가까움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서쪽 방향에서 고갯길을 내려와 한국마사회의 종마목장을 지나 왼쪽으로 주촌마을 가는 길을 따라가면 논개 생가지가 나옵니다. 임진왜란 때 왜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으로 뛰어들어 후세에 길이 영웅으로 추앙되는 논개의 생가를 복원 한 곳입니다. 그녀의 원래 생가 터는 현재의 위치보다 아래쪽인데 저수지 공사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입니다. 커다란 문을 들어서면 푸른 산을 배경으로 논개의 동상과 기념관이 보이고 그 위쪽에 복원된 초가집 한 채가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의로운 기생 논개’로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잘못된 역사교육 탓일 것입니다. 굴곡이 심했던 그녀의 생애였지만, 대의를 위해 몸을 던질 수 있는 의로움은 아무나 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곳 주촌 마을에서 태어났고 진주에서 의로운 죽음을 맞았지만 무덤은 육십령을 넘어오지 못하고 함양 서상면에 있습니다. 무더위에 시신을 더 이상 운구할 수 없어서 그리 되었다니, 육십령 높은 고개가 논개에게는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한 장벽이었나 봅니다.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속도의 시대입니다. 어느 날 문득 일상을 옭아맨 시간을 벗어 던지고 육십령을 올라보십시오. 거기서 삶의 가치는 다른 곳에서 빛날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육십령식당에 걸린 등산안내 리본들이 주인의 인심을 대변한다.
▲ 호텔 출신 주방장이 운영하는 휴게소는 깔끔한 레스토랑이다.
▲ 주촌면에 자리한 논개 생가에서는 그녀의 생애를 자세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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