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잘못됐다면 죽어서 혀는 타지 않게 하소서”

 

구마라집은 이곳에서 죽을 때 까지 경전의 번역과 강의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래서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전은 300권이 넘습니다. 〈법화경〉, 〈반야경〉, 〈아미타경〉 등의 대승경전은 그 후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국에 속하는 한국 일본에서도 그들의 근본 성전으로 독송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갑자기 거대한 허탈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공허였습니다. 그는 번민했습니다. 갈등했습니다. 그는 발버둥을 쳤습니다. 구마라집의 방대한 불경번역은 바로 이 번뇌와 깨달음의 부조화 속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광막한 타크마르칸 사막에는 서역의 북도와 남도의 두 길이 있습니다. 이곳은 동서교역의 요로이지요. 북도는 돈황에서 북상하여 이오에 이르고, 또 고창을 지나 구자에 이르며 다시 소륵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곳은 모래의 바다로서 바위와 모래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는 죽음의 사막입니다.

이렇게 가혹한 서역의 구자국에서 구마라집은 약 서기 344년경에 태어났는데 그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천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인 구마라염이고, 어머니는 구자국왕의 누이동생이었습니다. 9살 때 구마라집은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함께 인도에 가서 불교에 관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즈음 그의 어머니가 월지국에 가서 아라한 한 분에게 구마라집을 소개했습니다.

“이 사미는 35세에 크게 불법을 펴서 수많은 사람을 제도할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다가, 하루는 구마라집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등의 깊은 가르침을 중국에 펼치는 일이 오로지 너에게 달렸다.”

그렇게 아들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던 어머니는 아들을 훌륭한 성자로 만들기 위해서 모든 정성을 다했습니다. 구마라집은 처음에는 소승불교를 배웠지만 후에 대승불교로 전환하여, 특히 용수(龍樹)의 공(空) 불교와 〈반야경〉은 물론 〈법화경〉의 해독에 전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 중국의 장안에서 세력을 떨치던 전진왕 부견은 여광장군에 이상한 명령을 내립니다.

“덕이 있는 상서로운 별이 외국에 나타났으니, 이는 큰 지혜를 가진 분으로 중국에 모셔 오면 도움을 줄 것이다. 그대는 하루라도 빨리 구자국을 정벌도록 하여 그 분을 모셔오도록 해라.”

여광 또한 명령을 받들며 말했습니다.

“나도 서역에 구마라집이라는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 현상은 필시 그분을 두고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구마라집 때문에 일으킨 전쟁, 모름지기 인류사에서 처음 있는 이상한 전쟁이었지요. 그만큼 부견은 불교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컸습니다. 구자국의 멸망, 하여 구마라집은 여광에게 붙잡혀 양주까지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만 부견이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부견이 살해된 것을 알게 된 여광은 그곳에서 양주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고, 구마라집은 그곳에서 무려 16년 동안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중국어를 배우게 되었고 수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후진의 요흥은 홍시 4년(401년)에 양주를 정벌하고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역시 불교를 존중하던 요흥은 구마라집을 국사로 봉했지요.

구마라집은 이곳에서 죽을 때 까지 경전의 번역과 강의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래서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전은 300권이 넘습니다. 〈법화경〉, 〈반야경〉, 〈아미타경〉 등의 대승경전은 그 후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국에 속하는 한국 일본에서도 그들의 근본 성전으로 독송되었습니다. 또한 용수의 중론, 대지도론 등의 공사상을 설한 논서의 번역은 중국인들에게 진실한 불교의 사상을 전해주게 되었습니다.

구마라집은 자신의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번역이란 이미 입에서 한 번 씹은 밥을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것과 같아, 원래의 맛을 잃는 것은 물론 심지어 구역질까지 느끼게 한다.”

그리고 한역에 대해서도 손사래를 쳤습니다.

“천축의 풍습은 문채를 몹시 사랑하여 그 찬불가는 지극히 아름답다. 지금 이것을 한문으로 옮겨 번역하면 그 뜻만 얻을 수 있을 뿐 그 말까지 전할 수는 없다.”

그는 단순한 학자가 아닌 이렇게 정열적인 사람이었고, 의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계율을 파계한 파계승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한 때 여광은 구마라집과 구자국의 왕녀를 한방에 가두어 놓고 술을 마시게 했습니다. 구마라집은 간단하게 이 왕녀와 사랑을 나누고 인생을 즐겼습니다. 또 구마라집을 존경했던 요흥은 너무 뛰어난 구마라집의 재능에 놀라 어떻게 해서라도 구마라집의 자손을 남겨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어느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처럼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습니다. 당신이 죽으면 이러한 재능이 없어집니다. 이 천하를 위해서 자손을 남겨 주십시오.”

그리고 아름다운 후궁 3000명 중에서 미녀 열사람을 뽑아 구마라집의 시중을 들게 하였습니다. 물론 구마라집은 이 또한 마다않고 미녀들과 생활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보통의 승려라면 이러한 파계의 행위는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준엄하게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어떤 저항도 없이 미녀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낮에는 중국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대 번역사업에 열중하여 차례차례 번역을 진행해 갔고, 저녁에는 열 명의 미녀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마음껏 쾌락을 누렸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그를 걱정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엄연한데 스승님께서는 어찌하여 왕들과 여자들을 멀리하지 않으십니까?”

구마라집은 빙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시궁창 속의 연꽃을 살리기 위해서는 연꽃만 따지 말고 시궁창도 함께 가져와야 한다.”

열 사람의 미녀와의 생활은 오직 시궁창 같은 생활로써 지저분할 뿐이었지요. 그런데 구마라집이 이러한 말을 한 것은 자기 자신이 시궁창 속에서 피는 연꽃이며 진실한 연꽃임을 확신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색다른 자신의 시궁창 생활을 반성했을 때 이래서 되는가 하고 자책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끝내 미녀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구마라집의 열정은 미녀들을 뿌리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책감이 들어도 몸이 말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갑자기 거대한 허탈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공허였습니다. 그는 번민했습니다. 갈등했습니다. 그는 발버둥을 쳤습니다. 구마라집의 방대한 불경번역은 바로 이 번뇌와 깨달음의 부조화 속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확실히 시궁창 속에서 핀 한 떨기의 아름다운 연꽃이었습니다. 그 연꽃은 다름이 아닌 부처님 말씀의 핵심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오직 한 가지 일이었습니다. 구마라집의 번역은 산스크리트 원문과 어느 정도 다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중국어에 유창하면서 그 의미를 약간 다르게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구마라집이 자기의 번역문이 모두 원문과 다르지 않다고 자신하는 것은 그의 깊은 체험으로부터 힘차게 용솟음치는 그것이었습니다. 그의 시궁창 속에서 힘차게 피는 연꽃의 체험은 경문의 진의는 이래야 한다는 확신과 신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번역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구마라집은 한자에도 통달하여, 전에 번역된 경전과 산스크리트 본을 비교하여 잘못된 점을 살폈습니다. 홍시 8년(406), 초당사에서 승려 800여 명과 사방의 의학(불교) 승려 2000여 명을 모아 옛 경전을 고증, 교정하여 한역 〈묘법연화경〉 7권을 역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구마라집은 자신의 임종을 깨달았습니다. 육신의 힘이 다한 것이지요. 그는 조용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법화경〉을 여러분이 힘써 유포시켜 주시오. 만약 번역한 것에 오류가 없다면, 내가 죽은 후에 몸을 태워도 혀는 타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다비한 후에 혀를 찾아보니 몸은 전부 탔는데도 혀는 조금도 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후세의 학자 위천인(韋天人) 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마라집은 총명해 대승을 잘 이해하여, 과거 칠불(七佛) 이래로 내려온 부처님 말씀을 번역하고 전해 법왕(부처님)께서 남기신 뜻을 잘 드러냈다. 세속에서는 계를 허물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 구마라집은 삼현보살(三賢菩薩)의 지위에 오른 분이었으니, 이런 분은 오직 그 하나다.”

정말 이 동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 구마라집. 그가 있었음으로 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은 비로소 부처님의 법을 받아들였고, 그가 있었음으로 하여 비로소 우리는 부처님의 경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가 마침내 〈법화경〉 번역을 모두 마치고 임종하는 마지막 순간 외친 그 말. 이런 수행자들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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