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는 불자사형수에 영치금 넣어주며 선교 "불자라면 어두운 곳 밝히는 등불 돼야죠!"

사비 털어 20년간 교도소 찾아다녀
‘봉사하러 가서 오히려 받게 돼요’

▲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20년간 홀로 교도소 상담 봉사를 해온 김필연 씨. 지식보다 행(行)이 먼저인 그는 불교교리에 밝진 않아도 스스로 체득한 가르침을 꾸준히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 아들로 태어났으면 이런 곳에 있었겠습니까?”

재소자 상담봉사를 하고 있는 김필연(60) 씨에게 얼마 전 한 불자사형수가 무심결에 건넨 말이다. 김 씨는 이 사형수와 수년간 인연을 맺어오며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음에도 이 짧은 한마디가 가슴 한편에 ‘콕’ 박혔다.

그도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터. ‘내 자식도 각박한 상황에 내몰리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이 사형수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빚쟁이, 도망 다니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했다. 한때는 부모의 관심을 받고 싶어 잘못된 행동까지 저지르며 1주일간 유치장에도 있어봤지만 부모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고.

김 씨는 그래도 함께 불법(佛法)을 공부하는 사이여서 단순한 위로와는 조금 다른 말을 꺼냈다. “출가했다고 생각하세요. 법우님은 여기서 공부만 하면 되잖아요.”

그러자 가만히 귀 기울이던 사형수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교도소에 잘 온 것 같아요. 여기 안 왔으면 죽을 때까지 부처님 가르침 공부 안 했을 거 아니에요.”

대화를 마친 김 씨는 교도소 밖으로 나왔다. 푹푹 찌는 여름 날씨가 기분을 나쁘게 만들지는 않았다. 주고 싶어 간 곳에서 도리어 많은 것을 받았다는 흐뭇함 때문이었다.

편견 버리고 교도소 봉사 나서

김필연 씨는 불교계에서 ‘신념 있는 교도소 봉사자’로 잘 알려져 있다. 남들은 쉽사리 찾아가지 않는 교도소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지 20년이 넘었다. 사람들은 이런 김 씨에게 ‘그것 참 필연(必然)이네’라고 농을 거는데, 사실 그의 이름은 부처님 가르침을 닮은 ‘필연(必蓮)’이다.

“아버지가 면사무소 호적계장이셨어요. 제 이름을 지으려고 옥편을 펼쳤는데 책상에 연꽃이 확 피어나는 느낌을 받으셨다더군요. 아버지는 제 이름을 짓고 나서 ‘너는 다른 종교를 믿으면 안 된다. 꼭 불교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독립유공자 김창희 선생의 피를 물려받은 그의 아버지는 항상 정직ㆍ청렴ㆍ봉사 등을 강조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김 씨는 집에 먹을 것이 있을 때마다 주위 친구들과 나눴다. 공직생활을 한 아버지 덕분에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터라 어려서부터 갖는 즐거움보다 주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임종을 앞두고 그에게 “돈 벌 생각하지 말고 사회봉사를 많이 하라”고 당부했다. 그렇지만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김 씨도 처음부터 교도소 봉사활동을 한 건 아니었다.

주로 한국스카우트연맹에서 활동했던 김 씨는 1992년 어느 날, 일간지에서 여성상담교육 공고를 보고 정식교육을 받은 뒤 ‘여성의 전화’ 상담 봉사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면서 함께 울고 웃는 걸 좋아하는 그의 성격과도 잘 맞았다. 그렇게 한동안 가정폭력ㆍ성폭력 등 다양한 사례를 상담하며 상담기술을 쌓은 그에게 뜻밖의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평소 알고 지내던 김천교도소 교도관이었다.

“김필연 선생님, 청소년 수감자들을 위해 상담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김 씨는 자신을 찾아주는 것이 무척이나 고마웠지만 생전 가본 적 없는 교도소는 막연히 두려웠다. ‘교도소는 범죄자를 교정하는 곳’이라는 생각에 부정적인 마음이 앞섰다.

“그런 놈들한테 무슨 상담이 필요합니까? 태평양에 다 갖다 빠뜨려도 시원찮을 판에.”

김 씨는 수감자들을 위해 상담해줄 필요는 없다고 다짐하며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이내 본의 아니게 막말을 한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는 ‘흉악범도 아닌 청소년인데…’라고 생각을 바꿔 며칠 뒤 김천교도소를 직접 방문했다. 첫 교도소 봉사활동이었다.

“교도소에 봉사활동 가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죄를 지은 아이들과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개인적으로 정의(正義)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죗값을 치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불의를 저지른 사람들을 만나는 데 거부감이 있었거든요. 근데 막상 교도소에 가서 아이들을 만난 후 저에게 편견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교도소에서 만난 아이들은 김 씨의 생각보다 천진했다. 친해지기까지 비교적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이후에는 자신을 잘 따르는 아이들을 보며 교도소 생활에 대한 부분이나 성장하며 느끼는 고민 등에 대해 친절하게 상담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갖고 있었던 교도소에 대한 선입견을 하나 둘 깨어나갔다.

청소년부터 사형수까지 감싸 안아

혼자서 교도소 봉사활동 다니길 몇 년, 김 씨는 어느 날 청소년불자연합 파라미타(현 파라미타 청소년연합회)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불교여성개발원 창립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동국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지인이 많았던 그는 인맥을 동원해 불교여성개발원 창립에 힘을 보태면서 복지분과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단체가 생겼음에도 인력이나 자금이 넉넉지 않아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때 김 씨는 자신이 해오던 교도소 봉사활동을 추천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교도소를 찾아가 엄마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교화하자고. 이런 뜻에 공감한 4~5명의 교정위원들은 김 씨와 함께 김천교도소를 방문해 아이들에게 먹을거리를 주기도 하고, 상담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1년간 면회를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청소년 50명을 강당에 모아놓고 회식을 하던 날, 그 중에 모친이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걸 뒤늦게 알고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생일케이크를 못 받아본 아이들이 많아서 그런지 케이크를 사주면 대부분 눈물을 흘려요. 그 모습을 보면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다보니 삐뚤어질 수밖에 없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죠.”

그의 이런 노력에 청소년 수감자들은 감사편지를 수없이 선물했다. 지금도 김 씨의 집에는 편지들이 박스째 보관돼 있다. 게다가 교화하던 한 청소년이 출소했을 때는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해 집에 데려와 일주일간 돌보기도 했다.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씨는 교정위원들과 함께하는 교도소 봉사활동 내용을 불교여성개발원 소식지에 실어 홍보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됐다. 25년 넘게 사형수 교화활동을 해 온 노병섭 거사의 사형수 상담 권유였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형수 상담’, 김 씨는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애들 만나서 교화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사형수는 많이 벅찰 것 같다’는 말로 10개월 동안이나 거절을 했다. 하지만 노 거사의 간곡한 요청에 2001년 10월, 불교여성개발원 교정위원들과 함께 서울구치소를 방문했다.

“사형수는 다 울퉁불퉁하고 험상궂게 생긴 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고요. 의외로 표정이 밝은 사람도 많았어요. 아무래도 불자사형수들과 상담을 해서 그런지 비교적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었어요.”

상담은 막힘이 없었다. 부처님 가르침을 함께 공부하고, 사담을 나누며 서로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사형수들은 이런 김 씨에게 “선생님께서 이렇게 노력하시는데 내가 더 삐뚤어지면 안 되지 않겠느냐”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 씨는 이후 개인 사비를 털어 전국에 있는 14곳의 교도소를 다니며 교화활동을 펼쳤다. 영ㆍ호남 지역 교도소에 갈 때면 교통비와 음식값, 영치금 등을 합쳐 1회에만 20~30만원이 들어갔다.

불교계 운영, 출소자 쉼터 서원

김 씨는 오래 전 어느 사찰에 가서 스님들에게 교도소 교화활동을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당시 스님들은 그의 부탁에 교도소를 방문했고, 김 씨는 감사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이어 들려온 소식은 그에게 큰 실망을 안겨줬다. 스님들이 교도소에 가기 싫어 서로 미루다가 결국 추첨을 해서 갈 사람을 정했다는 뒷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전생의 업(業)에 따라 현생을 사는 것이라면 수감자들을 무작정 미워해선 안 되죠. 이들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진정한 중생구제가 되지 않을까요? 초하루나 사찰 행사 때 매번 오는 사람들만 구제하면 그게 불교인가요? 재가자보다 스님들이 앞장서 주시면 큰 변화가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 많이 아쉽죠.”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한 달 일정을 정할 때 항상 교도소 봉사가 1순위다. 스님들이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마저 하지 않으면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와 인도를 다녀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봉사를 빠진 적이 없다. 이런 그의 공덕 때문인지 연을 맺은 어느 수감자는 교정대상을 받았고, 사형수에서 무기수가 된 이는 A로 도배된 방송통신대학 성적표를 보여주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은 김 씨에게 “교도소 봉사 안 했으면 집을 몇 채 샀을 것”이라고 덕담 아닌 덕담을 하지만 정작 김 씨는 개의치 않는다. 봉사는 단순히 내 것을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쉬운 건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출소자들을 위한 시설이 없다는 점이다. 연등회 때 청소년 출소자 쉼터를 만들기 위해 홍보도 해봤지만 주위 반응은 냉담했다.

“수감자들은 일단 사회에 나오면 막막해 합니다. 가족ㆍ친지가 없는 이들도 많고, 범죄자라는 낙인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으니까요. 여름보다 지내기 힘든 겨울에 범죄자가 늘어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죠. 개신교의 경우에는 교도소를 서로 가려고 해요. 어느 정도냐면 서울에 있던 불자사형수가 대전에 내려가면 그 교도소에 가서 영치금까지 넣어주고 개종을 권유합니다. 비교가 안 되죠. 교도소에 대한 불교계 인식이 더 따뜻하고 자비롭게 변하길 기도합니다.”

잘못된 스승 때문에 희대의 살인마가 된 앙굴라마라. 그는 부처님을 만나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진정한 수행자로 거듭났다. 과연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외는, ‘모든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사홍서원의 제1서원을 얼마나 실천하고 사는가? 향을 싼 종이에선 향내가 난다.

그렇다면 불심 깃든 이가 누군가를 품으면 그에게도 불심이 배어나지 않을까? 어두운 곳을 환히 밝히는 등불, 이게 바로 참 포교다.

▲ 지난 7월 28일부터 8월 8일까지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열린 제 23회 세계잼버리(보이스카우트 세계야영대회)에 한국스카우트 불교연맹 소속으로 참석한 김필연 씨(오른쪽 네 번째).
▲ 김필연 씨와 외국 보이스카우트 단원들이 불교문화체험 일환으로 단주를 만들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한국스카우트 불교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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