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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송춘희 백련장학회장‘노래 통해 佛法 만나 ‘남김없이 주는 삶’ 사는 참 불자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목탁 소리와 함께 반주가 시작되는 노래 ‘수덕사의 여승’(1966년)은 노랫말이 애절하다. 혹자는 이 가사가 불교를 폄하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노랫말의 주인공이 일엽 스님이 아니냐’며 제자들이 항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래는 가수 송춘희를 법사 송춘희로 살게 만든, 한 여가수의 인생 여정을 180도 뒤바꿔놓은 노래이기도 하다. 송춘희(79) 백련장학회장을 8월 28일 서울 종로 동산불교대학에서 만났다.

노래가 좋아 시작한 가수의 길
송춘희의 고향은 평안북도 영변이다. 그녀는 해방 직후 미군정이 시작되던 무렵, 부친이 인천에 자리를 잡자 모친과 동생 둘의 손을 잡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형제가 8남매로 늘어나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급기야 부친은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수원여고를 다니던 그녀는 맏이로서의 책임감과 노래를 좋아하는 마음에 한 살배기 막내 동생을 등에 업고 악극단 오디션장을 찾아갔다.

“소녀가 갓난애를 업고 갔으니 누가 오디션 보러온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어요. 원래 가르치는 걸 좋아해서 대학교수를 꿈꿨지만 형편에 맞지 않았고, 워낙 노래를 좋아해서 이 길이 더 낫겠다 싶었죠.”

국민학교 때 학예회가 열릴 때면 노래하는 걸 좋아했던 10대 소녀가장이 단순하게 선택한 돈벌이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Love me tender’를 불러 합격했다. 하지만 부친의 반대가 심했다.

“처음 악극단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께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의 후손인 양반집에서 딴따라가 웬 말이냐’며 엄청 반대하셨어요. 매도 많이 맞았죠. 그래서 아버지한테 붙잡히지 않게 지방에서만 공연하기도 했어요.”

악극단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보수적인 아버지를 피해 주로 지방에서 공연을 다니다보니 관객 수가 적어 여관비를 밀리거나 배를 곯는 일이 빈번했다. 건빵 한 봉지로 사흘을 버티기도 했다. 하지만 촛불을 켜놓고 공연하거나 마이크가 없을 때도, 심지어 점심값을 못 받았을 때도 노래를 부르는 건 즐거웠다.

악극단은 몇 년 뒤 재정악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해체됐다. 이후 극장과 나이트클럽 공연을 거쳐 작곡가 오민우 선생을 만나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송춘희는 ‘삼다도 편지’, ‘울산 방어진’ 등의 곡으로 정식 데뷔한 뒤 ‘영산강처녀’를 부르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악극단 시절 1000원이었던 출연료는 어느새 1만원을 넘었고,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열 식구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충당했다.

   
 

‘수덕사 여승’으로 불교와 인연
승승장구하던 송춘희의 인생을 뒤바꿔놓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66년 발표한 노래 ‘수덕사의 여승’이다. 일가친척 대부분이 개신교를 믿었기에 자연스레 기독교신자로 살아왔던 송춘희에게 사찰은 물론이고 불교는 생소한 영역이었다. ‘수덕사의 여승’을 부른 이후 송춘희는 사람들에게 “절에 가봤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사람들이 저를 볼 때마다 ‘수덕사에는 가보고 노래를 부르느냐’고 물어봤어요. 그때만 해도 교회를 다닐 때여서 절에 가본 적은 없었죠.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절에 한번 가봤어요. 사찰예절도 모른 채 그저 법당에 들어섰는데 마치 부처님이 저를 보고 빙긋 웃는 것 같았어요. 그 느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더군요. 그날 이후로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혼자 절에 가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어요.”

절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에는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심 깊은 불자가 된 건 아니었다. 단순히 마음이 편하다는 점에 이끌렸기 때문에 스님의 법문을 듣거나 경전을 보지도 않았다. 그러길 10여 년. 송춘희가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1976년 미주한인회 위문공연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일어났다.

교포를 위한 위문공연이 드물던 시절, 미국에서 공연을 하는 송춘희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그 후 캐나다에서도 공연을 하게 됐는데 관객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비구니 스님이었다. ‘수덕사의 여승’에 따른 인연이 아닐까 싶어 송춘희는 공연을 마치고 스님을 찾았다. 저 멀리 걸어가고 있던 스님에게 달려가 “스님, 관광오셨어요?”하고 묻자 스님은 “포교하러 왔다”고 답했다. 비구니 국제포교 1호인 광옥 스님(전 전국비구니회 부회장)과의 첫 만남이었다.

송춘희는 그날부터 귀국일까지 열흘 동안 공연시간을 제외하고는 광옥 스님과 붙어 다녔다. 처음으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어떻게 해야 불교를 빨리 알 수 있는지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했다. 특히 부처님 일대기가 담긴 책을 읽었을 때는 알 수 없는 환희심을 느껴 동생에게 ‘조계사 앞에 가서 불교서적 좀 구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여승’ 노래를 불러서 그런지 비구니 스님이 그렇게 반갑더라고요. 또 불교에 대해 굉장히 잘 가르쳐주셔서 삼시세끼를 절에서 먹을 정도로 거의 절에 살다시피 했죠. 광옥 스님과 보낸 열흘이 불교공부 1년 한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불교에 입문한 송춘희의 열정에 광옥 스님은 당시 미국에 있는 숭산 스님에게 ‘법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LA에 머물던 숭산 스님은 시애틀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 ‘백련화(白蓮華)’라는 법명을 지어줬다. 숭산 스님은 “참선 도중 연밭에 피어난 한 송이 백련을 봤다. 불가(佛家)에서 백련은 부처님을 상징하니 부처님 같은 삶을 살라”고 당부했다. 당시 그곳에서 반년 넘게 행자생활을 했을 정도로 그녀의 불심은 깊어졌다.

음성 포교부터 장학사업까지
가수가 직업인 그녀가 불교에 심취한 후 처음 느낀 것은 찬송가처럼 부처님을 찬탄하는 노래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당시 불자들은 사찰에 와도 법회의식 등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축원만 듣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기도만 올리고 법당을 나섰다. 그래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불교’에 대해 고민을 했다.

송춘희는 1983년 삼귀의ㆍ보현행원ㆍ청법가ㆍ사홍서원 등 불자들이 꼭 알아야 할 찬불가를 묶어 음반을 냈다. 그리고 여러 사찰을 돌면서 찬불가를 보급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합창단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어느 사찰에서는 ‘경건해야 하는 법당에 노래가 무슨 말이냐. 마구니야 물러가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노력하길 수 년, 사찰 합창단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낸 음반은 ‘찬불가의 교과서’ 역할을 하게 됐다. 이후 불자가수 남강수와 함께 〈법화경〉 28품을 찬불가로 만든 음반 ‘법화경의 노래’를 출반하기도 했던 그녀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 조계종 제1회 포교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불교교양대학을 다니던 40대의 송 씨는 어느 날 “봉사하러 가자”는 도반의 권유에 교도소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재소자 불교반장으로부터 “재소자 중에 할머니가 아이들을 키우는 집이 있다. 좀 도와줄 수 없겠느냐”는 요청을 듣고 흔쾌히 수락, 아이들의 학비 지원을 시작했다. 그게 인연이 돼 사형수의 자식들도 맡게 됐고, 동사무소에서 부모 없는 아이들을 알려주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학비를 지원해야하는 아이들 수가 10명이 넘어섰다. 혼자 감당하기 버거웠던 그녀는 성지순례를 가면서 도반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이 사연을 접한 도반들은 ‘십시일반해서 아이들을 돕자’며 돈을 걷었고, 이 돈은 백련장학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1991년 청소년 22명의 학비를 지원하면서 백련장학회가 첫 발을 내딛었다. 올해로 24주년. 백련장학회는 그동안 30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장학회 회원은 50명 정도지만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회원은 30명이 채 안 돼요. 그래도 대부분 정기법회에 동참하면서 함께 불교를 공부하고, 장학회 회의도 하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누군가 해야 할 일인데 우리가 조금 앞장서서 한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못 간 대학을 젊은 친구들이라도 가는 걸 보면 흐뭇하죠. 앞으로도 장학금 지원 사업이 지속되도록 노력할 겁니다.”

그녀는 30여년 째 군법당을 찾아다니며 군포교에도 앞장서고 있다. 군장병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고, 찬불가를 가르치면서 군포교의 ‘큰엄마’ 역할을 맡았다. 군법당 건립불사에 적극 후원하면서 군법당 5곳이 낙성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줬다.

사찰서 불자가수 적극 활용을
이런 그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려서는 소녀가장으로 동생 7남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결혼조차 못 했고, 이후 평생을 찬불가 보급과 교도소ㆍ군포교ㆍ장학사업에 매진해온 그녀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정한 ‘무소유’의 삶이다. 살고 있는 집도, 사용하는 핸드폰도 친동생 명의다. 생명나눔실천본부에 장기기증 희망등록까지 하면서 ‘내 것 남기지 않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요즘엔 동생들에게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꿀을 묻힌 뒤 산에 뿌려라. 짐승들이 배라도 채울 수 있게”라는 우스갯소리를 한단다. 오랜 세월동안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2004년 초에는 위암수술을 받는 등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 ‘부처님께서 포교하라고 살려주셨나 보다’라는 생각이 드니 자연스레 욕심이 사라지더란다.

그녀는 요즘 부처님 가르침에 더 가깝게 다가서기 위해 사경 수행을 하고 있다. 아침예불은 늘 빠지지 않고, 틈날 때마다 <법화경>ㆍ<금강경>ㆍ<반야심경> 을 사경한다. 지금까지 <법화경> 한글본 10번, <금강경> 한문본 27번을 사경했고, <반야심경>은 100번 쓰는 노트를 10권이나 끝냈다. 하지만 가수이자 신심 돈독한 불자인 그녀다보니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불교계에 대한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 여러 사찰에서 여는 산사음악회에 불자가수보다 종교와 무관하게 유명 연예인들을 섭외하는 풍토다.

“어느 산사음악회에 갔는데 십자가 목걸이를 한 친구들이 공연을 하더군요. 그래서 주지스님에게 얘기했더니 ‘내 돈 갖고 내가 하겠다는데 왜 지적이냐’면서 되레 저를 혼내더라고요. 그 돈이 스님 돈이겠어요? 그 이후로 같은 일을 또 겪을까 싶어 지적을 안 해요. 그래도 산사음악회면 그에 맞게 신심이 우러날 수 있도록 구성을 해야죠. 이런 문화는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불자가수들 중에 실력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인터뷰를 마치고 다른 약속이 있다며 묵직한 가방을 양어깨로 멘 송춘희. 그녀의 뒷모습에는 팔순을 앞둔 노보살의 ‘불제자로 살겠다’는 오롯한 서원이 배어 있었다. 불법(佛法)을 켜켜이 쌓아올린 참된 불제자의 모습에 고개 숙여 합장인사만 올렸다.

윤호섭 기자  sonic0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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