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에 가려진 자기성찰
짧은 현실도피로 합리화
스스로 내면 닦아 맞서야

V불교의 기본 원칙인 사성제와 팔정도, 그리고 자비 중심의 윤리관과 연기론적 존재론은 만대에 불변하다.

그러나 불교의 구체적 의미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게 돼 있다. 그만큼 불교는 만대 불변의 진리인 동시에 시대와 상황에 따른 방편이기도 하다. 자본ㆍ기술 만능시대인 오늘날에는 인간에게 자율적 내면을 구축할 수 있는 힘을 심어주는 불교가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 기능을 할 수 있다. 

‘자본의 지배’는 꼭 대자본이 국가를 좌우하고, 주요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우리 욕망의 지형, 우리 내면까지 침투해 지배한다. 한 가지 예로,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 구 소련의 체르노빌과 같은 최악의 핵 참사가 일어났지만 그 직후 한국에서의 원전에 대한 지지율은 여전히 64%였다. 원전에 기대 사는 건 핵폭탄을 베개 삼아 자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이 분명해져도 자본이 심어주고 가꾸어온 ‘성장’과 ‘효율’의 논리는 여전히 우리 의식을 지배한다. 원전 사고가 잠재적으로 한반도를 사막화시킬 수 있어도, 우리의 대중적 의식은 여전히 ‘성장률 저하’나 ‘부동산 가격 급락’에 대한 공포를 그 축으로 삼아 도는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 삼독 중의 탐(탐욕)과 치(어리석음)에 해당하는데, 자본이 지배하는 내면 속에서 이에 대한 자성이 일어날 여지조차 없다는 점이 문제다. 6바라밀 중 특히 정진ㆍ선정ㆍ지혜 바라밀을 수행하자면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자리를 조용히 지켜볼 만큼의 ‘나’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의 시간을 자본이 자꾸 식민화한다. 이미 1970~80년대 이후로는 한국인이 평균 하루 3시간 정도, 즉 깨어있는 시간의 약 1/6 이상 TV 시청에 소모한다. 거기에 요즘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가세해 개개인에게 조용한 여유 시간을 남겨주지도 않는다. 한국인들의 평균 스마트폰 이용시간(매일)은 3시간 30분이며, 컴퓨터 이용시간은 약 40분이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은 얼마쯤 남을까? 

물론 기술 그 자체를 악마화 할 필요는 없다. 기술은 그저 도구일 뿐이고, 그 도구 이용의 선악은 그 이용자의 의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전자자본의 의지란 이윤을 뽑아내거나, 이윤 본위 체제를 당연화시켜 그 체제 안에서의 ‘성공’에 대한 미몽을 심어주는 데 있다. 전자자본이 전하는 뉴스 등의 프로그램이 ‘성공’, ‘성장’, ‘성취’의 이름으로 타인들과의 비교를 강요하고, 결국 열등감 등 아상에의 집착과 탐욕을 부추긴다. 그리고 결코 이룰 수도 없는 ‘성공’의 감몽을 쫓느라고 죽기살기로 일하는 사람에게 잠깐의 현실 도피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게 연예와 오락이다. 그러나 그런 도피도 잠시일 뿐, 그 다음에는 또 욕망 자극과 고통의 악순환이 기다린다. 

불교의 힘이란, 자본이 우리의 사적 일상마저도 세세히 지배하는 시대에 자비와 정진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불자들이 자본의 논리에 맞서 자기만의 내면의 영토를 구축해, 같은 의지를 가진 선지식들과 연대하면서 생성된다. 이 세계를 전쟁으로 비화될지도 모를 열강들의 각축이나 환경참사 같은 대형재앙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면, 깨어있는 사람들의 국제적 연대만이 이 세계를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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