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 자비 동전 양면
수행을 모르는 승려라 해도
재가자로서 예를 갖춰야

마음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는 수행(修行)의 종교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스님들도 수행을 해야 한다면서 산으로, 선방으로 떠나는 경우를 종종 보며, 신도들에게도 시민선방이나 기도·염불·독경 등의 여러 수행생활을 강조한다.

우리들은 수행이란 닦음을 행하는 것, 즉 닦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소위 깨달음을 위하여 평소에 닦으라는 것인데, 과연 이런 가르침이 부처님 말씀에 타당한 지 생각해봐야 한다. 본디 불가에서의 수행이란 행을 닦는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고 삼계유식이라는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닦을 행이란 심행(心行)을 의미함은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생활 속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음 움직임에 따라 이뤄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심행을 닦는다는 것은 결국 행주좌와 어묵동정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생활 자체에서 이뤄져야 한다. 우리의 행위로 이뤄지는 삶의 매 순간이 바로 마음의 행을 닦는 수행의 순간이다.

또한 행은 업의 근거다. 2500년 전 지금도 유지될 정도로 견고한 인도의 카스트 제도 앞에서 신분이나 사람의 존귀는 태생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에 따른다는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진리를 설파한 부처님 가르침에 본다면 업해라고 불리는 삶의 현장에서 어떤 행위를 하면서 살아가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일상생활에서의 행이 연기실상에 근거할 때 이는 자타불이의 자비행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비록 각 개인에 있어서 특별한 수행방법도 있고 또 탐진치 속에 살던 이가 본격적인 수행의 삶을 살기 위해 예비적으로 필요한 다양한 수행방법도 있지만, 가장 기본적이자 최종적인 수행방법이란 동체대비의 삶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고, 이것은 삶이 곧 수행 그 자체임을 말해준다.

요즘 불미한 행태가 불거져 나오고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 승가에 대하여 뜻있는 재가자들이 수행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승려들에 대하여 보시를 포함해 삼배의 예 드리기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생기고 있다. 그 뜻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상기해 본다면, 그들의 잘못된 행의 터전이 되는 보시는 거부하더라도 항상 예는 갖추어야 한다. 몹쓸 욕을 한 사람에 대하여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무대응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부처님께서 잔치집 음식의 예를 들면서 주인이 낸 음식을 손님이 먹지 않으면 결국 그것은 주인이 먹게 된다고 비유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타인에 대한 예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상대방에 대한 잘잘못에 대하여 분명히 바라보되, 재가자로서 출가자에게 항상 온 마음을 다해 예를 갖추고 공경할 때, 상대방이 그 예와 공경을 충분히 받을 수행자라면 여법한 모습이 될 것이요, 상대방이 재가자의 예를 감당치 못할 이라면 그 공경과 예의 몫은 예를 드린 이의 몫이 된다. 예를 드린다는 것, 그 자체가 스스로의 수행이자, 삶 속의 모든 행위가 수행이 되는 이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승속을 떠나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자비의 마음으로 자신과, 이웃과, 뭇 중생을 대하고, 이들에게 탐진치로 인해 생겨나는 불필요한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열심히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수행과 자비가 선후가 있거나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임을 상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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