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위한 혁명도 자비실천
정업은 정견으로 이어져
각자 자기 삶 점검해 봐야

가끔 역사 공부가 참 한심하게 느껴진다. 인간들이 아무리 서로 연대하여 자유나 평등, 민주를 향해 돌진해도, 결국 완승을 거두지 못하고 중간에서 부분적으로나마 패배하는 것이 역사다. 레닌 시절에 만국 피억압자들의 연대투쟁을 외쳤다가 스탈린시절에 접어들어 ‘일국 사회주의’로 대폭 축소된 러시아 혁명의 굴절만 봐도 이길 수 없는 슬픔이 스며든다.

역사는 진보ㆍ퇴보의 끝없는 반복이란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런데도 역사를 공부하는 보람이 하나 있다. 이 모든 굴절ㆍ왜곡ㆍ퇴보 속에서도 자유와 깨달음을 향한 인간의 본능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26년 전, 소련에서 대학입시 과목의 하나인 국사(소련사) 시험을 준비할 때에, 한 편의 글을 읽고 정말 감동한 적이 있다. 당시 한국에서 흔히 ‘허무당’이라고 불렸던 인민주의적 테러리스트인 나탈리야 클리모파(1885~1918)라는 여성이 1906년 사형을 앞두고 사형수 감방에서 쓴 고백의 편지였다. 그녀는 감옥형으로 감형돼 형장에서의 죽음을 면하게 됐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장문의 편지를 썼다. 자유를 위해 적도 자신도 희생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그 여성이 “죽음을 기다리면서 하등의 공포없이 순간순간을 즐겼다”고 쓴 내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녀가 ‘순간’을 즐겼던 이유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서, 개아(個我)의 삶도 죽음도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둘러본 모든 생물, 모든 타자(他者)들의 신체 세포 하나하나가, 결국 그녀와 에너지 흐름의 하나로 순간적으로 파악됐다. 그리고 그 흐름의 아주 깊은 근원 속에서 그녀는 무한한 희열의 원천을 발견했다. 그것을 실감한 이상, 더 이상 두려워할 일도 없었다. 공포의 뿌리는 개아의 상(像)에 집착하는 데에 있다. 개아의 환상이 벗겨지고,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진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 공포는 사라진다. 원융의 세계, 모든 생명에 대한 외경의 기쁨만 남는 것이다.

클리모파는 불경을 읽은 적이 없을 것이다. 굳이 불교가 뭔지 몰라도, 그녀가 편지에서 묘사한 깨달음은 그 본질에 있어서 불교에서 말하는 깨침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테러리즘이라는 방법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결국 타자들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혁명활동은 넓은 의미에서 자비의 실천이다. 그런 실천을 하면서 실존적 고민을 계속하게 될 경우 삼라만상ㆍ일체중생 중에서 나에게 타자가 없다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를 과연 직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바르게 실천죂正業죃하는 사람은 바른 세계관죂正見죃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다. 역사에서 자유를 향한 몸부림 속에서 이렇게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게 되면, 절로 환경이 강요하는, 체제의 틀에 박힌 삶과 다른 삶을 한 순간이라도 살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런 충동들을 느끼게끔 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효용이 아닐까? 물론 나를 포함해 선남선녀 대부분은 클리모파와 같은 혁명가가 될 수 없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혁명의 화염 속으로 던진 사람의 입장에서 나의 삶을 한 번이라도 돌아보고, 나는 과연 자타불이의 진리를 어디까지 실천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해보는 것도 소중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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