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고통주는 직업
세상과 타협하여 이어가
중요 가치 먼저 살려야

수많은 부모들의 공통적 심성이지만, 엔지니어였던 나의 아버지도 나에게 당신의 직업을 그대로 이어가는 ‘가업잇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내가 이공계가 아닌 인문계로 입문한 데에 대해 아버지는 오랫동안 불만을 품고 불평해 왔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아이에게 직업을 전수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개발주의 시대를 사신 아버지에게 엔지니어라는 직업은 아마도 ‘신성’하게 보였겠지만, 나는 나의 직업에 대해 회의적일 뿐이다.

역사를 연구해 과거의 사실을 복원한다고 해서 과거의 비극들이 재현되는 것을 막아 일체중생들의 이고득락(離苦得樂)에 도움을 준다는 게 과연 현실적인가? 기득권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치인들의 각종 만행 앞에서는 사학도들이 현실적으로 무력할 따름이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거울삼아 ‘이렇게 항해하다가는 이 배가 필히 침몰된다’고 경고할 수 있지만, 침몰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나의 아이에게 직업에 대해서는 ‘어느 직종에 투신하라’는 말보다 차라리 ‘어떤 어떤 직종을 피해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대원칙의 차원에서 남에게 고통을 주는 직업을 피해달라고 아이에게 부탁하고 싶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직업이란 무엇인가? 일면으로는 불문가지의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직업군인이 돼서 아프간 파병 등의 대외침략에 가담하라는 명령을 받을 수 있고, 굳이 그런 명령을 받을 일 없어도 평상시에 전쟁세력들의 잠재적인 총알받이로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은행에 입사해서 실직 당한 채무자가 살고 있는 집을 회수하면서 그 가족들을 거리로 내쫓는 일을 하다가 당신의 가슴부터 갈기갈기 찢겨질 터이니 금융착취 기관에 투신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해보라”는 등의 당부를 하고 싶다. 여기까지는 나와 비슷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체로 공감할 이야기다. 평소 나의 신념을 아는 아이도 내가 말하기도 전에 무슨 말인지 바로 눈치 챌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고해(苦海)에서 일견 ‘괜찮아’ 보이는 직업들도 잘못하면 악업을 쌓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언론인을 보라. 언관이 되어 사회의 목탁이 되고 약자의 편에 서준다면 이는 선행 중의 선행이지만, 언론사도 이윤추구적 기업인 만큼 이게 과연 쉽기만 할 것인가? 예컨대 국제부 기자가 되어 미군이 이라크에서 이슬람 국가를 토벌한답시고 전투원인지 비전투원인지 알 수도 없는 수십여 명의 현지인들을 미사일로 죽였다는 국제통신사 소식을 아무 평론도 없이 실어준다면, 이게 과연 살인자들의 악행을 당연시되게끔 만드는 악업을 쌓는 일이 아닐 것인가? 그러나 과연 주류 언론사에서 미군의 살인에 대한 비판의 자유는 어디까지 주어지는가? 살인을 최악의 악업으로 여기는 불자로서의 양심을 지켜가면서 과연 그런 언론사와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억압과 착취, 패권과 국가적 살인의 악세(惡世)에서 산다. 이 악세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체게바라와 같은 위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선남선녀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타협의 중도를 걷는다. 그것이 불가피할 수 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타협한다 해도 나에게 핵심적으로 중요한 가치(예컨대 국가폭력에 대한 거부 등)를 어떻게든 살려본다는 것이다. 직업 선택을 고심하는 나의 아이에게 이것만이라도 제대로 납득시킬 수 있다면 나는 아마도 비교할 수 없는 환희심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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