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사 보탑, 경천사지10층석탑
원형 고증·현대적 해석한 첫 사례”

관문사 옥불대보탑 학술대회 신은정 씨 주장
8일 천태종 주최·천태불교문화연구원 주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당시인 2005년 최종 복원된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원형 고증에 입각해 소실된 부분의 추정복원은 생략했다. 반면 이를 모본으로 삼아 조성 중인 관문사 10층 옥불대보탑은 근거자료를 통해 소실된 원형을 고증, 현대적 해석으로 추정 복원한 적극적 개념의 복원이란 점에서 의의가 크다.”

천태종 총무원이 주최하고, 천태불교문화연구원이 주관하는 ‘관문사 10층 옥불대보탑 조성 학술대회’가 8일 오후 1시 서울 관문사 옥불보전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신은정 엔가드 문화재연구소 연구지원팀장은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 복원에 대한 연구’란 논문을 통해 현재 조성 중인 관문사 보탑의 가장 큰 의의를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적극적이고, 현대적인 복원이라 주장했다.

신 팀장은 경천사탑 원형 복원 근거를 원각사지 10층 석탑에서 찾아 제시하면서 “문화재의 원형 복원은 중 소실된 부분의 복원은 많은 역사적 책임감이 동반된다”며 복원의 신중함을 강조한 후 “연구의 오류로 왜곡된 형태의 복원이 되기도 하므로 복원 후에도 소실 부분의 연구는 지속돼야 한다”며 관문사 보탑 조성의 담긴 의의를 덧붙였다.

앞서 열린 개회식에서 천태종 총무원장 춘광 스님은 ‘총총히 잘 이어진 지붕에는 비가 새지 않는 것처럼 마음을 단단히 거두어 가지면 탐욕은 결코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는 〈법구경〉의 한 구절을 인용한 후 “모든 신앙의 처음과 끝이 바로 마음이다. 불탑신앙 역시 지극하고 굳건한 마음이 아니고는 그 신앙적 성취를 이룰 수 없다”고 마음과 불탑신앙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스님은 이어 “오늘 학술대회는 불탑 신앙이 갖는 종교적 의미와 문화 예술적 가치 그리고 역사적 연원까지 두루 살피는 계기가 되어 우리 불자들이 바른 신행을 하는 지침이 되길 바란다.”고 법문했다.

이봉춘 천태불교문화연구원장도 개회사를 통해 “관문사 옥불대보탑 건립은 옛 고려시대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복원·재현하는 뜻 깊은 불사”라면서 “학술대회를 통해 보탑 조성의 참 정신과 의미가 되새겨지고, 우리 모두의 삶이 대탑의 위용처럼 의연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이어 관문사 부주지 월도 스님은 축사를 통해 “관문사 10층 옥불대보탑은 경천사 10층 석탑의 양식을 계승해 간다는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서 “관문사는 이 옥불대보탑이 조성됨으로써 한 층 격조 높은 도량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학술대회 개최를 축하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신은정 팀장 외에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가 ‘경천사 10층석탑의 불교사적 의의’, 정영호 한국교원대 명예교수가 ‘경천사 10층석탑과 원각사 10층석탑의 비교연구’, 문명대 동국대 대학원 교수가 ‘경천사 10층석탑 16불회도 부조 도상의 연구’, 권기현 위덕대 교수가 ‘불탑신앙의 성립과 전개’, 신소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가 ‘경천사 10층석탑 기단부 도상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다음은 논문 요지.

"고려시대 신행 다양성 체계적 표현"


▲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
경천사 10층석탑의 불교사적 의의-홍윤식 / 동국대 명예교수

경천사의 석탑은 기단부에서 탑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상을 부조로 나타내고 있다는 데 우선 그 특징적 요소를 살필 수 있다. 석탑에 이와 같이 많은 변상이 부조되어 있다는 것은 석탑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양식까지 변화시키고 있어 주목을 끌게 한다.

탑신에 여래상이나 보살상을 부조하여 불감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 이래의 일이라 하겠으나, 경천사10층석탑에 이르면 탑신부를 본격적인 불당으로 상징화하고 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즉 1층에서 3층 탑신부에는 한 층에 4개의 불당을 3층까지 나타내고 있어 모두 12개의 불당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밀교의 양계만다라에서 볼 수 있는 태장계의 12원 구조를 수용한 것이란 설도 있으나, 그를 조직하는 각 원은 한국불교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데 주목을 끌게 한다. 그것은 탑 조성기에 대화엄이라 하고 있음이 2층 탑신부의 화엄회를 중심으로 1층, 2층의 변상을 화엄만다라로 조직하고 있음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양상은 13세기말에서 14세기에 걸쳐 유행하였던 고려불화 '화엄정토교변상도'와의 상관관계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불당형식의 석탑은 탑파에 의한 사리신앙과 불당에 의한 불상신앙을 통합하고 있는 것 같아 우선 그 일차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한편 이 같은 형식의 석탑에서 고려시대 신앙형태의 다양성과 불교사상의 다양성을 알 수 있게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를 체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경천사탑 세밀한 실측 통해 완형 찾아야”


▲ 정영호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경천사10층석탑과 원각사10층석탑의 비교연구- 정영호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원각사10층석탑과 경천사10층석탑을 비교 고찰해 보면 우선 건조 재료에 있어서 대리석이라는 희귀한 석재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같으며 기단부부터 탑신부 3층까지의 평면, 4층 이상의 평면 등이 모두 같다. 그리고 기단부부터 탑신부에 이르기까지와 각 면의 조각까지도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원각사탑 건립을 경천사탑과 거의 같은 때로 추측한 억설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경천사탑은 고려 제29대 충목왕4년(1348)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각사탑은 조선 제7대 세조13년(1467)에 낙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건립연대의 관계에서 본다면 양 석탑의 건립연대의 차이는 119년이라 하겠다.

그런데 경천사탑은 고려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형태의 석탑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원각사탑이 유일하게 경천사탑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국초부터 배불숭유라는 국시로 인하여 위축 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세조대에 이르러 불교를 옹호하여 국왕부터 불전(佛前)에 나아가고 있었으니 이때가 조선시대 불교의 재흥시(再興時)로 원각사를 창건하였던 것이다. 경천사의 위치는 경기도 개풍군으로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리하여 원각사를 창건함에 있어 기교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경천사탑을 모범으로 하여 원각사10층석탑을 건립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992년 12월 당시 문화체육부 문화재관리국의 위촉을 받아 ‘원각사지10층석탑 정밀실측조사 현장’을 여러 차례 답사하며 이러한 세부의 정밀실측조사는 하루 속히 경천사10층석탑도 실시해야 될 것이라는 생각이 간절했다.

경천사10층석탑은 1907년 일본으로 불법 반출할 당시의 상황이나 각 부재의 검토 내용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 검토 사실 여부조차 알 길이 없다. 그 후 반환되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해체된 체 흩어져 있던 것을 1959년 복원에 착수하여 다음해인 1960년에 완공하였는데 이때의 실측 도면이나 검토 내용 등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천사탑을 관찰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복원할 때의 각 부재가 제자리에 놓였을까 하는 점이다. 그것은 10층 옥개석을 볼 때 7, 8, 9층 옥개석보다 큰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경천사탑도 하루라도 빨리 원각사탑과 같이 세밀한 실측을 진행하여 전문가들의 세세한 관찰과 진단으로 앞으로의 영구적인 보존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랜 수난 속에서 각 부재에 많은 손상을 입었는바 1960년도 복원 당시 부분적인 손질로 다소의 보강은 되었으나 미흡한 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4층 4면 모두 불회도, 16불회도로 봐야”

 

▲ 문명대 동국대 대학원 교수.

경천사10층석탑 16불회도(佛會圖) 부조 도상의 연구- 문명대 / 동국대 대학원 교수

원각사지10층석탑과 마찬가지로 1~3층 탑신 각 면 상단부에 12불회도, 4층 탑신 각면에 4불회도 등 모두 16불회도가 부조되어 있다. 각 불회의 명칭은 탑신 위의 옥개부분에 새겨져 있는데 서로 분리되기 때문에 이동 때나 수리 때 명문과 탑신면이 서로 바뀔 수 있다. 따라서 몇 번의 이동이 있었으므로 잘못 조합된 경우도 있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도상내용과 다른 명칭[銘文上名稱]이 사용된 경우도 있을 것 같다.

1층의 불회도 장면은 원각사탑과 동일한 4불회도[東: 미타회, 南: 삼세불회, 西: 영산회, 北: 용화회]이고, 2층은 서(西) 원각회, 동(東) 다보회 외에, 북(北) 화엄회, 남(南) 법화회가 서로 방위가 바뀌었으며, 3층은 원각사탑과 동일한 4불회도[東: 약사회, 南: 소재회, 西: 전단서상회, 北: 능엄회]이고, 4층은 원각사탑의 석가회와 지장회가 경천사탑에서는 방위만 서로 바뀌어 있다. 어느 탑이 원래의 모습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둘 다 약간의 착오는 있는 것 같다.

이상을 요약하면 첫째, 방위가 원각사탑에 비해서 바뀐 경우[2층과 4층], 명칭이 바뀐 경우[2층 다보회], 불회 내용과 명칭이 다른 경우[경천사탑, 원각사탑 1층 남] 등이다. 첫째, 2층 동(東) 다보회는 법화회이며, 남(南) 화엄회는 다보회이고, 북(北) 법화회는 화엄회로 추정되므로 서로 명칭부분을 바꾸어야[移動]할 것이다. 둘째, 4층의 동(東) 석가회와 서(西) 지장회는 원각사탑과는 반대되는데 경천사탑의 방위가 맞을 것 같다. 셋째, 내용과 명칭이 다른 경우인데 1층 남(南) 삼세불회는 본존불이 비로자나불이고 좌우는 미륵과 아미타불로 추정되므로 중앙은 삼신불(三身佛)의 본존불이며 좌우는 삼세불의 좌우불이어서 삼신불과 삼세불의 혼합된 형식으로 추정된다. 이런 삼신불과 삼세불의 결합형식은 조선시대에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불회도들에 대해서 1층에서부터 3층까지 모두 12회라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말하고 있으나 명칭이 새겨진 불회는 4층의 1회까지 모두 13회이므로 원각사탑이나 경천사탑이 모두 13회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명칭이 새겨져 있지 않은 4층의 3면도 명칭이 새겨진 1면[南:원통회]과 동일한 도상 내용이므로 4층 4면을 모두 불회도로 보고 16불회도로 판단한다.

석탑의 형식이나 양식은 원의 장인들에 의하여 조성되었다는 〈동국여지승람〉의 설은 모두 사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설계단계 등에 관여했음을 시사한다고 생각된다.

이는 4면두출식 아(亞)자형 석탑이고, 석탑의 부조들, 특히 1-4층에 새겨진 16불회도의 조각양식에서 새로운 특징이 나타나고 있는 점 등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상에는 티베트계의 이른바 라마양식의 특징은 거의 나타나지 않아서 티베트 양식의 수용문제는 재검토를 요하게 하고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탑 시대 변해도 앞선 유행 일정 유지"


▲ 권기현 위덕대 교수.
불탑신앙의 성립과 전개-권기현 / 위덕대 교수

불탑신앙의 역사적 전개를 밝히는 데에 가장 큰 난관은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학적 자료의 시대적 불일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고고학적 자료는 어느 정도 시대별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반면, 문헌적 자료는 혼재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초기 경전이라고 하더라도 오랜 구전 끝에 문헌자료로 편집되어 전하는 내용이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차이를 인도의 역사를 통해 최대한 좁히고, 아울러 추론으로 간극의 접점을 찾고자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도출한 결과는 아래의 표와 같다.

 표1 

시 기

근거자료

탑의 기능

고대 인도

모헨조다로 유적, 베다

성단(聖壇)

부처님 재세시

6종탑, 초기경전

분묘

열반 이후

근본 10탑

예배․공양 대상

표2

마우리야 아쇼카왕

(즉위년 B.C. 270)

8만4천탑

공덕 신앙

슝가왕조(B.C. 2C)

산치 ∥탑․바르후트 대탑 등

탑경전신앙

기원 전후(불상 출현)

간다라․마투라 조각,

산치 1탑(1c초), 대승경전류

구원신앙

굽타왕조 및 팔라왕조

아잔타․엘로라,

사르나트, 남인도 불탑

〈금강정경〉, 〈대일경〉

오불신앙

위의 표에서 탑의 기능과 신앙형태는 전대에 있었던 모습이 후대에 사라지고 새로운 신앙으로 나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변화해도 앞선 유행이 일정 부분 유지되었고, 각 시대마다 특징적 유행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끝으로역사적으로 탑은 진호국가를 위해 많이 건립되었는데 이번 불사를 계기로 민족의 염원인 한반도의 남북과 동서가 하나되는 통일의 염원이 담겨지길 발원해 본다.


“관문사 보탑, 원형 고증 바탕 현대적 추정 복원”


▲ 신은정 엔가드 문화재연구소 연구지원팀장.
개성 경천사지 10층석탑 복원에 대한 연구- 신은정 / 엔가드 문화재연구소 연구지원팀장

경천사탑 원형 복원의 근거는 다섯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10층 옥개석 마루부분에 나타나는 각이 꺾여 들어간 부분을 볼 때 10층 옥개석 위에 연결되는 부재는 합각면이 있는 팔작지붕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둘째, 10층 옥개석 끝에 남아있는 용발톱 조각을 보았을 때는 10층 옥개 위에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마찬가지로 팔작지붕이 교차된 십자형 지붕부재가 놓이고, 합각지붕 내림마루 끝에는 용 조각이 표현되었으나 현재는 본 탑의 합각지붕 부분이 소실됐고 10층 옥개석에는 용 발톱 조각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동형식(同形式)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에 비쳐볼 때 10층 옥개석은 십자형 지붕구조이다. 넷째, 본 석탑에서 합각지붕의 상륜부 조성 예(例)는 이후에 조성된 보현사, 묘적사, 수종사 등에 영향을 미쳤고 표현은 보다 간략화 되어 나타났다. 다섯째, 3층 옥개석<上>과의 유사성을 감안할 때 10층 옥개석 역시 탑신부가 같은 마감형태를 차용했을 것이고, 제2탑신부가 마감되는 10층 옥개도 팔작지붕이 교차된 십자형 지붕과 같은 형식으로 마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경천사탑의 조성당시 원형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경천사탑은 1902년, 1960년의 조형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는 등 오랜 수난의 역사를 가지는데, 현존하는 용발톱 조각, 10층 옥개석 마루의 꺾인 각, 동일 형식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10층 옥개석, 현존하는 경천사탑의 유사부분들을 통해 완형(完形)의 10층 옥개석을 찾아낼 수 있다.

따라서 2005년 최종 복원 시에는 조성당시의 원형이라고 연구된 팔작지붕이 십자로 교차하며, 내림마루 끝에 용이 조각되는 조형으로 복원하였다. 십자형의 중앙에는 별도의 상륜 장식이 안치되었을 것이나, 상륜 장식은 근거자료가 부족하여 추정할 수 없었다. 다만 경천사탑의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기법으로 미루어 상륜 장식 또한 화려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천사탑은 역사적 문화유산으로써 원형 고증에 입각하여 소실부분의 추정복원은 생략되었으나, 관문사 옥불대보탑은 원형 고증을 바탕으로 현대적 해석의 추정복원이 이루어 졌다. 근거자료 부족으로 정확한 원형을 복원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창작이라는 점에서 관문사 10층옥불대보탑의 복원은 과거 속에서 현재를 이어가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다.

경천사탑의 원형복원은 보존을 위한 주변환경 조절이나 현상 유지와 같은 소극적인 복원이 아니라, 근거자료를 통해 소실된 원형을 복원하는 적극적 개념의 복원이었다. 따라서 원형의 진정성에 대해 이견(異見)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재의 원형을 복원하는데 있어, 특히 소실된 부분의 복원은 많은 역사적 책임감이 동반된다. 연구의 오류로 인해 때로는 왜곡된 형태로 복원되기도 하였기에, 복원은 주로 가역적인 방법들로 이루어졌으며, 복원 후에도 소실부분의 복원 연구는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래 요소와 전통 균형 이룬 독창적 석탑”

▲ 신소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경천사 10층석탑 기단부 도상 연구- 신소연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1348년에 건립된 국보 86호 경천사(敬天寺) 십층석탑은 각 층마다 다양한 도상을 갖춘 대리석 석탑으로 형식이나 도상면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천사 석탑 기단부 평면은 소위 ‘아(亞)’자 형태로 하대중석, 중대중석, 상대중석 부재의 노출된 각 면에 부조가 남아 있어 20여 장면씩 총 60면에 부조가 되어 있다. 그러나 기단부는 사람의 손이 닿기 쉽고, 여러 차례에 걸쳐 이전과 복원을 거듭하면서 크게 손상돼 온전히 남아 있는 부재가 많지 않다.

기단부 하대중석에는 용·사자·연꽃이, 중대중석에는 서유기 장면이, 그리고 상대중석에는 나한상이 조각되어 있다. 불공을 드리러 온 사람들은 불교를 수호하는 용과 사자를 지나, 온갖 고난을 극복한 현장의 구법행을 통해 나한을 만나게 된다. 상대중석의 나한상은 크게 기암괴석 속의 나한상과 바다 위의 나한상을 표현하였다. 이들 나한상들은 동시대 나한상을 그렸으며, 이후 조선시대 나한도에 등장하는 나한 모습의 원형이 되었다.

서유기 부조는 이제까지 실체가 분명치 않았던 원대 〈서유기〉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점에서 미술사적·문학사적으로 모두 중요하다. 여러 장면에 걸친 내용 전개는 명대 유행한 통속문학의 삽화를 연상시킨다. 통속문학의 삽화가 불교 건축물의 초안으로 사용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서유기 부조를 통해 서유기 판화의 시작이 원대부터였음을 알려준다. 이는 명대 판화의 원형을 보여주는 매우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경천사 석탑이 건립된 지 약 120년 후 원각사 석탑 건립 당시 유사 재질의 동일한 도상을 지닌 석탑이 건립되었다는 것은 초본과 같은 매뉴얼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러한 매뉴얼 형태는 서유기 부조의 도안이 소설 〈서유기〉를 도해했던 회화 작품, 특히 판화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증명한다. 경천사 석탑은 양감을 풍부히 살려 입체감을 강조하고 내용 전개에 필요한 세부를 꼼꼼히 표현하여 이야기 전개에 충실한 반면 원각사 석탑 부조는 경천사 석탑과 같은 입체감은 표현하지 못했으며 매우 평면적일 뿐만 아니라 세부 묘사에 있어서 생략한 표현들이 많다. 원각사 석탑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서유기의 내용을 인식하고 부조한 것이 아니라, 전체 도상초의 일부로서 인식하고 도상을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경천사 석탑의 기단부는 원대 티베트-몽골 불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거론되어 왔다. 특히 기단부의 아(亞)자형 평면 형태는 라마교 불탑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기단부 도상의 경우 서유기 도상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도상과 나한상과 같이 불교회화에서 볼 수 있는 기존의 도상이 모두 남아있다. 경천사 석탑은 고려 말 원대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석탑이자 외래적 요소와 전통적 요소가 균형을 이룬 새로운 형태의 독창적인 석탑이다.

▲ 삼귀의를 하는 스님들.
▲ 법어를 하는 총무원장 춘광 스님.
▲ 축사를 하는 관문사 부주지 월도 스님.
▲ 개회사를 하는 이봉춘 천태불교문화연구 원장.
▲ 학술대회를 경청하고 있는 스님들.

 

▲ 주제발표 후 진행된 종합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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