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의 소의경전인 《법화경》에는 문자로 적은 불교의 진리를 많이 베껴 쓰라고 강조한 사서공양(寫書供養)이 다섯 가지 수행방법의 하나로 나온다. 

이는 경전을 베껴 널리 퍼뜨리기 위한 사경(寫經)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교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경전을 좀 더 속히 찍어내는 영인(影印)으로 바뀌었다. 이같은 경전의 영인은 목판본(木版本)인쇄로 전환하는 효시가 되었다.

이 무렵의 목판본 인쇄물이 지난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서기 700년대 초부터 750년대에 찍은 것으로 추정하는 이 목판본 대다라니경은 다른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와 함께 발견되었다. 모든 악법을 물리치고, 선법을 지킨다는 내용을 담았다. 

다라니경의 숫자가 많을수록 더욱 좋은 공양불사로 여겼다고 한다. 더구나 다라니경을 탑 속에 넣어야 큰 공덕을 지을 수 있다는 믿음과 맞물려 탑불사(塔佛事)까지 부추겼다는 것이다.

석가탑에서 대다리니경을 발견한 지도 벌써 41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불교계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환 요청을 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이 여태 소장하고 있다. 처음 발견 당시 목판본 종이가 습기를 머금어 부식되었고, 산화로 바스러져 복원 중이라는 이유로 공개를 꺼렸다. 그런데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대다라니경에 든 탑중수기(塔重修記) 내용을 한 언론사에 흘린 모양이다. 어느 대학의 교수가 판독했다는 중수기의 일부를 한 일간지가 널름 받아 석가탑 다라니경의 제작시기를 8세기가 아닌 11세기로 보도했던 것이다.

이같은 보도는 ‘탑파분퇴(塔坡分頹)'를 ‘탑을 부수고, 나누어 무너뜨렸다.'로 풀이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탑은 여러 부재를 짜 맞추어 지었기 때문에 하나하나를 들어내 해체한다는 상식을 모르고 한 소리라는 비판이 만만치 않다. 이 해석 대로면, 고려시대에 석가탑을 다시 새로 지은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이때 두루마리 대다라니경을 탑 속에 넣었다는 중수기만 믿은 터라, 앞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다라니경 또한 11세기 유물로 단정하기에 이르렀다는 뒷말도 들린다.

이를 두고, 학계는 검증되지 않은 주관적 주장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보도에 따르면, 중수기 판독문을 읽은 한국학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의 멘트가 나온다. 이분의 견해는 문장의 흐름으로 보아 대다라니경을 새로 지어 탑에 넣었다기 보다는 재봉안한 유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쓴 중수기에 대다라니경 기록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를 고려시대 유물로 단정하는 것은 너무 비약적인 논리라는 이야기다.

이 대다라니경 경문에 나오는 측천무후자(則天武后字)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당나라를 다스린 서기 685~704년까지 통용했던 이른바 측천무후자가 4종류 10글자나 보인다. 더구나 측천무후를 자청한 ‘조(照)'자는 그녀의 집권기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고려되어 신라 쪽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어떻든 역사의 진실은 검증되어야 한다. 귀중한 자료를 흘린 당사자의 명성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두(吏讀)를 아는 어문학자와 서지학자는 물론 종이의 지질을 가릴 연구자와 더불어 사학자까지를 모아 연구결과를 제대로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이라면, 반세기 가까이를 기다린 사람들이 더 참지 못할 까닭이 없다.) 더구나 대다라니경은 이 시대의 불자 모두가 성보(聖寶)로 우러러 하면서, 친견(親見)의 날을 고대하는 민족의 기록문화유산이다.

'한국의 고고학' 황규호 상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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