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 가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다문화 가정이 꾸준히 늘고 있는 가운데 이혼과 폭력 등 문제점 또한 증가하는 데 따른 관심의 표명으로 보입니다. 통계청의 2010년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다문화 가정은 38만 6977가구로 집계됐습니다. 다문화 가정은 주로 아시아 여성들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한국 사회에 편입하는 형태로 형성되고 있는 게 일반적 현상입니다. 그런데 ‘다문화’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서로 다른 문화와 의식이 공존하는 사이에서 충돌은 불가피한가 봅니다. 우리와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조롱하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경제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경향이 다반사로 나타나고 있다는 게 전문기관들의 보고입니다.

특히 다문화 가정을 이룬 부부 사이에서는 언어 소통의 어려움 뿐만 아니라 사회적 편견,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혼란, 육아 및 자녀교육에서 겪는 곤란, 부부 갈등 등이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문제점으로 거론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국가에서도 관련법을 제정해 다문화 가정을 돕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즉 ‘다문화 가족 지원법’과 ‘다문화 가족 지원법 시행령’을 2012년 제정해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관련법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불자들이라면 나와 이질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편견으로 대하거나 불평등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모든 강물이 바다에 이르면 강으로서의 이름이 없어진다. 모든 사람도 진리라는 바다에서는 평등하다.”

〈증일아함경〉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이 말씀은 절대평등의 진리를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바다는 온갖 물이 흘러 들어와 이루어집니다. 바다로 흘러들어 오기 전 어느 물이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수구 물이었든 똥물이었든 개천물이었든 이 물들은 흘러 흘러 강물을 이루고 강물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옵니다. 일단 바다에 합류하게 됐을 경우 어떤 물이었는지 그 연원은 묻혀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분과 계급 따위는 부처님 품 안에서는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일단 부처님 품으로 들어오면 ‘일불제자’로서 누구나 일체평등의 지위를 누립니다. 강물이 중생을 의미한다면 바다는 부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품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차별받거나 억압되거나 편견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일불제자’의 의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재세 당시 제자를 받아들일 때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인도의 사성계급(四姓階級)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신분제입니다. 부처님은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전 이 신분제를 부정하셨던 분입니다. 여러분이 경전을 통해 알고 있는 부처님의 제자 똥꾼 ‘니다이’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었습니다. ‘니다이’가 부처님의 설법에 감복해 제자 되기를 발원하자 다른 제자들이 일제히 나서 반대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몸을 접촉하는 것마저 불허하는 천민을 교단에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러한 제자들을 만류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귀천은 태어난 신분과 계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는 행위에 따라 그 사람이 천해지기도 하며 귀해지기도 하는 법이다.”

이 말씀 뒤에 부처님은 앞에 소개한 “모든 강물이 바다에 이르면 강으로서의 이름이 없어진다. 모든 사람도 진리라는 바다에서는 평등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듯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또 어떠한 신분을 지니고 있든 따지지 않고 오직 불법을 수행해 ‘아라한’을 이루려 한다면 부처님의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제자 중에는 ‘니다이’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수두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세계에서는 외형으로 사람을 판단하려 하고 신분과 계급의 차별을 당연시 하고 있습니다. 만일 외적인 눈으로 형상만을 보게 된다면 지혜의 눈을 잃게 됩니다. 지혜로운 이는 외형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 속의 진실을 보려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이와 다른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 〈비유경〉에 소개되는 내용입니다. 옛날 한 거사가 문수사리를 보고자 원을 세웠습니다. 대중을 향해 크게 보시를 행하고 높은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매우 추하게 생긴 노인이 눈꼽이 끼고 콧물을 질질 흘린 채 거사가 만들어 놓은 높은 자리에 떡하니 앉아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거사는 화를 내며 땅에 끌어내리고 쫓아 보냈습니다. 그날 밤 매우 피곤하여 잠이 든 거사의 꿈에 한 보살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너는 문수사리를 그렇게 보고자 하였으면서 문전박대하여 내쫓은 이유가 무엇이냐? 아까 그 높은 자리에 있었던 이가 바로 문수사리니라.”

거사는 외양에 치우친 나머지 문수사리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이를 부처님 대하듯 하라 가르칩니다. 모든 이를 부처님 대하듯 한다면 문화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다 해서 차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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