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과 두 번의 호란
300년 뒤 일본에 강점
역사의 교훈 되새길 때

영화 〈명량〉을 보았다. 아군의 배 13척으로 130여척의 왜군을 무찌른 명량의 스토리 자체가 이순신 신드롬을 불러올만하다. 지난 8월말까지 1700만의 관객을 모은 영화 〈명량〉의 흥행성공을 보면서 사람들은 오늘의 위기상황에서 국민들이 얼마나 이순신과 같은 리더십을 갈망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명량〉은 또한 임진왜란(1592~1598년)의 교훈을 되새기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영화에는 민간인들의 전쟁 참여와 아군의 판옥선에서 승려들이 노를 젓고 적과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임진왜란은 왜군의 침략에 맞선 조선의 총력전이었다.

서양에서는 프랑스혁명 때 혁명을 분쇄하려는 열강들의 개입에 맞서 프랑스에서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그보다 200년 앞서 왜적의 침략에 대항하여 총력전으로 맞섰다. 각지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났고 주자학 이데올로기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승려들도 서산·사명·영규 대사 등을 중심으로 호국의 기치를 들고 왜병과 싸웠다. 왜병의 침략과 살육행위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조선의 민관군(民官軍)이 모두 소아(小我)를 버리고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군사적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바다에서 23번 싸워 23번 승리한 완승의 비결은 객관적 상황파악과 철저한 사전 준비, 그리고 군사전략의 능숙한 운용에 있었다. 병법에 군주는 장수를 임명했으면 작전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금의 명령이라도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았다. 싸움에 져서 수군이 전멸되면 조선의 운명도 끝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암울한 임금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가 도체찰사(총사령관)와 영의정으로 임명한 유성룡이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임란 14개월 전 정읍현관으로 있던 이순신을 7단계 승진시켜 전라좌수사로 발탁함으로써 왜군을 물리칠 수 있게 했다. 그는 이순신에 대한 모함을 여러 번 막아주었고 정치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는 이순신 이외에도 권율과 같은 명장을 발탁하였고 선조가 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가거나 청주로 가는 것을 막아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그는 조선을 분할하려는 명나라와 일본의 계략을 간파하고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와 외교적 수완으로 이를 막아냈다.

임진왜란은 유성룡의 정치적 리더십과 이순신의 군사적 천재성 그리고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참여가 삼위일체가 되어 극복한 전란이다. 유성룡과 이순신은 전란의 교훈을 후세에게 전하고자 각각 〈징비록〉과 〈난중일기〉를 썼다. 그러나 후손들은 이런 교훈을 귀담아 듣지 않고 명분론과 당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조선은 임란 후 얼마 안 되어 두 번의 호란(胡亂)을 겪었다. 임란 후 300여 년 지나 일본이 주변 4강을 제치고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나라가 망할 때까지 조선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 역사는 반복된다. 6.25전란이 끝나고 60년이 지나 주변 4강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다시 각축을 시작하고 있다. 한국은 이번에도 내부갈등에 몰입돼 있다. 이제라도 임진왜란의 교훈을 깨달아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릴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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