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공화국 된 한국사회
소속 집단의 인정 중요
사회 변화 위한 원력 세워야

세월호가 침몰한지 4개월이 지났지만 나에게는 어제 같은 일이고, 오늘 같은 일이다. 세월호는 늘 내 생각 속에 있다. 피해자들의 억울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그들을 죽인 자본ㆍ국가의 총체적 부실이 언제나 또 새로운 희생자들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 즉, 이와 같은 죽음이 우리 공동체 전체를 위협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월호를 사유하다 보면 세월호라는 하나의 구체적 참극에서 생각이 점차 조금 더 추상적인 문제로 옮겨가곤 한다. 산 사람에게 타자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타자의 죽음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자세는 어떤 것일까? 도대체 우리 상상 이상의 현상인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산 사람에게 죽음은 무엇보다 무섭고 두렵다. 해탈의 경지에 오르신 분이 아닌 이상 ‘나’라는 개체가 실재한다고 그대로 믿고, ‘나’의 영구적 소멸이 모든 의미들의 파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늘 놀라는 것은 이 죽음이라는 공포 이상의 또 다른 공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죽음은 이처럼 절대적인데도 말이다. 인간은 군중 동물이기에 인간에게 죽음 이상으로 두려운 것은 동류로부터의 배제, 고립 그리고 모멸 등이다. 사회적 배제에 대한 공포가 죽음 공포보다 더 무섭다는 것은 전쟁마다 확인된다. 병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서도 전장을 떠나지 않는 것은 ‘겁쟁이’나 ‘탈영자’ 등에 대한 사회적 배제, 그리고 ‘용사’에 대한 존중과 깊은 연관이 있다. 결국 우리에게 죽음과 삶의 문제보다 우리 소속집단으로부터의 ‘인정’ 문제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불교의 논리로 볼 때 생(生)도 사(死)도 궁극적으로 고(苦)다. 그러나 같은 고(苦)라 해도 수많은 사람들은 늘 삶보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2010년 이후 OECD자살률 1위가 된 한국의 경우에는, 그런 사람들은 1년에 1만4000~1만5000 명이 된다. 이들 중에서는 가난과 사회ㆍ가족들의 무관심, 고립에 지친 노인들이 있고, 무의미한 성적 경쟁과 왕따에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청소년들이 있고, ‘잘릴까 봐서’ 늘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야 하는 회사원들도 있고, 가혹행위의 피해자로서 그 분노를 하루도 쉬지 못하는 군인들도 있다.

이 모두의 공통점이라면, 결국 신자유주의적인, 즉 상호 경쟁이 일상화돼 있는 사회의 병리 속에서 배제ㆍ고립ㆍ모멸을 당했거나, 당할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자살을 감행한 이들의 수도 이제 세계적 수준(?)이 됐지만 그것보다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다.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한국 대학생의 거의 3분의 1이 자살충동을 상당히 느끼거나 자살을 실제로 시도해봤다. 결국 죽음이 아무리 무섭다 해도, ‘경제능력’이 모자라는 등 주류와 약간이라도 다른 모든 이들을 무자비하게 배제하는 우리 ‘자살 공화국’에서의 삶은 죽음 이상으로 무서울 수도 있단 것이다.

결국 죽음을 대하는 예의로, 죽은 사람이 삶과 죽음 속에서 겪게 된 고(苦)를 염(念)해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의 고(苦)를 염하면서, 그 고(苦)를 벗어나려는 그의 꿈들을 생각하면서 다른 중생들이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 꿈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보태려는 원력(願力)을 내는 것은 죽음에 대한 바른 태도일 것이다. 죽은 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원(願)을 세우면, 상당수에게 죽음만도 못한 삶만을 허락하고 계속 새로운 희생자들을 만드는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유민이 아버지, 김영오 선생의 단식투쟁, 그리고 거기에 연대하는 수만 명의 시민들을 보면서 요즘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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