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수행으로 새로운 도풍 이뤄

2년 전 입적한 석주 스님의 수행이력을 살펴보는 학술세미나가 5월 1일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열린다. '한국불교 근 · 현대사의 산증인 석주 큰스님'이란 주제로 마련된 이번 행사에는 중앙승가대 총장 종법 스님의 기조발제(석주 스님의 도풍)를 비롯해 석주 스님과 근현대 한국불교(부천대 김광식 교수), 포교와 사회복지에 끼친 석주 스님의 업적(중앙승가대 교수 보각 스님) 등의 발표가 있게 된다. 다음은 기조발제와 주제발표문 요지이다.

△종범 스님
석주스님은 오랜 세월을 도심에서 정진하셨다. 그러는 중에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스님의 도풍을 느끼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스님에게서 느끼는 도풍을 '원력도(願力道)· 무주도(無住道)· 하심도(下心道)'로 표현해 보았다. 석주스님은 한국의 스님이다. 석주스님의 도풍은 한국불교의 문화적 기반위에서 이루어졌다.

1984년 2월에 발행한《승가》창간호에서 석주스님은 격려사를 통하여 "승려란 학문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외형적 태도만으로 되는 것은 더구나 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부처님의 인격에 닮아지고, 부처님의 덕행이 몸과 마음속에 젖어지고 배어서, 오늘의 한국불교계의 중흥조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숙연해지도록 원력을 다지게 하는 법문이다. 석주스님은 평소에 글씨를 쓸 적에 '慈室忍衣(자실인의) · 吾唯知足(오유지족)'을 자주 쓰셨다. '자실인의: 자비의 집, 인욕의 옷'은《법화경》「법사품」의 말씀이다. 그리고 스님의 '오유지족: 나는 만족을 알 뿐이다'는 작품은 유명하다. 우선 작품의 배열부터도 특이했다. 넉자의 한자가 모두 입구 자(字)라고 부르는 네모 글자가 있는데, 스님은 '□'를 복판에 놓고, 위로 吾, 아래로 足, 오른쪽으로 唯, 왼쪽으로 知를 써서 특별하고도 멋진 작품을 구성했다. 이렇게 '자실인의' '오유지족' 등의 글씨를 여러 사람에게 써 준 것에서도 스님의 도심세계를 짐작하게 한다. 자비의 하심과 만족을 아는 단아한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한국불교는 전통적인 수행방법으로 송주(誦呪), 간경(看經), 염불(念佛), 참선(參禪)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석주 큰스님께서는 이러한 수행을 기본으로 하되 '원행도· 무주도· 하심도' 평상시의 생활 속에서 일상수행으로 진정성을 담아 실행하여 '석주스님 도풍'을 이루셨다. 앞으로 한국불교의 새로운 수행의 법풍을 모색하는데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김광식 교수
석주 스님의 삶에서 선학원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그는 선학원에서 행자 수업을 하고, 출가를 하였으며, 만해 한용운을 만나 시봉하고 자연적으로 민족, 민족불교에 대한 꿈을 키워 갔던 것이다.

그는 범어사에서 6년간 강원 교육을 하고, 그 이후에는 각처 선원에서 참선 수행을 했다. 이처럼 그는 교, 선의 분야에서 균형적인 수행을 했다. 이런 수행의 힘이 일평생 동안 유지되면서 승려로서의 균형적, 모범적인 승려 상을 견지할 수 있었다.

1941년 유교법회 참가를 계기로 그는 일제 말부터 이미 불교정화에 대한 싹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때 이청담과의 인연은 이후 지속되면서 불교정화운동으로 지속됐다.

해방공간의 선학원은 불교혁신운동의 총본부였다. 당시 스님은 선학원에 머무르면서 불교 및 교단의 혁신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는 민족불교의 구현이었다고 보인다.

1950년대 불교정화운동의 초기, 스님은 정화를 발기하면서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온건적인 노선으로 말미암아 정화의 중반기 이후에는 깊숙히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계종단은 외형적인 정화는 이루어졌지만 교단 내부에는 무수한 문제점이 놓여 있었다. 정화 이후 스님은 정화운동의 문제점을 인식하여 개선하려는 소장파, 중견 승려들의 활동에 도움을 주면서 간혹은 그 흐름의 정신적인 중심부에 서 있기도 했다.

<금강불교 3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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