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로부터 세상이 혼란스럽거나 갈등을 빚게 되면 국민들은 눈 밝은 선지식이 나타나길 고대합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그런 형국에 놓여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국민의 낙담과 실망이 그 어느 때보다 깊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슬기롭게 풀어갈 수 있도록 길을 일러주고 국민의 절망을 다독여줄 큰 인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시대의 지침이 될 스승이 없다는 국민의 한숨 섞인 자조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스승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스승이 없는 불행한 처지가 된 것인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냉정히 말하면 우리 사회가 스승을 저버리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거짓에 현혹되고 외피적인 현상에 이끌리며,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숫타니파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존경받아야 한다. 배움이 깊은 그런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하라. 그러면 그는 너에게 마음을 다하여 길을 가르쳐 보일 것이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그 가르침을 열심히 들어서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긴다. 이런 사람을 가까이 하게 되면 너 역시 그 사람과 같은 경지에 이를 것이니. 그러나 사이비 스승을 따르는 사람은 말귀도 못 알아듣고 게다가 시기심만 많다. 그는 의심의 장벽을 넘어가지도 못하며 진리의 문을 열지도 못할 것이다.〈중략〉 그러므로 지혜롭고 배움이 깊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라. 사리를 잘 판단하고 착실히 살아가는 사람, 진리를 깊이 통찰한 사람은 마침내 저 행복의 문 앞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과연 상식에 합당하고 원칙에 부합하며 대중과 더불어 지혜롭게 살아가려는 사람을 존중하고 우대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실로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중요성을 깨우치지 못하는 우매한 삶은 결국 불행의 연속으로 이어집니다.

위기와 시련이 깊을수록 이를 극복해 나가게끔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분이 바로 스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스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의지가 돼야 합니다. 〈장엄경론〉에서는 스승의 자세에 대해 “선지식은 조복(調伏)ㆍ근적정(近寂靜)ㆍ수승공덕(殊勝功德)ㆍ근면(勤勉)해야 하며, 교(敎)가 풍부하고, 공(空)을 증득하고, 뛰어난 언변이 있고, 자비로워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훌륭한 스승이란 먼저 본인의 마음부터 조복한 자여야 다른 이에게 공동체에서 지켜야 할 계율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정확한 판단과 마음상태를[寂靜] 늘 유지해야 다른 이에게 지혜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교학이 풍부해야 언변이 뛰어나게 되며 언변이 뛰어나면 제자를 이해하기 쉽게 지도합니다. 특히 스승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탐욕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움을 받는 이로 하여금 실천의 기쁨을 느끼게 하고 자신으로서 어떠한 대가나 보상도 바래서는 안 됩니다. 바꿔 말하면 재물과 권력, 명예 따위를 조금도 돌보지 않는 이가 진정한 스승인 것입니다.

반면에 스승의 가르침을 구하는 이들로선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느냐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스승이 업신여기고 꾸짖어도 화를 내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같은 경전에 “만약 법을 설하는 이들이 법을 구하는 이들을 업신여기고 생각없이 보더라도 거기에 따라 말대답을 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 더 법을 추구하는 것과 같이 공경해야 하며, 싫어함이 없이 그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이르고 있습니다.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우리나라의 최고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손꼽히는 다산 정약용(1762~1836)에게 황상(黃裳, 1788~1863)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황상은 강진 사람으로 이곳에 다산이 유배오자 그에게 사사했습니다. 처음 황상은 다산이 문(文)을 닦기를 권유하자 둔하고 막혀있고 미욱하다는 이유를 들어 주저합니다. 그러자 다산이 말하길 “공부하는 자에게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너는 하나도 해당하는 것이 없다. 첫째 외우기를 빨리하면 그 폐단은 소홀한 데 있으며, 둘째 글짓기에 빠르면 그 폐단은 부실한 데 있고, 이해를 빨리하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게 된다. 무릇 둔하면서 파고드는 자는 그 구멍이 넓혀지며, 막혔다가 소통이 되면 그 흐름이 툭 트이고, 미욱한 것을 닦아내면 그 빛이 윤택하게 되는 법이다. 파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하면 되고, 소통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하면 되고, 닦기는 어떻게 하느냐? 역시 부지런하면 된다. 이 부지런함을 어떻게 다할 수 있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황상은 다산으로부터 들은 이 ‘삼근계(三勤戒)’를 평생 삶의 좌표로 삼아 노력하고 실천했습니다. 다산이라는 새로운 인생의 길잡이를 만난 황상은 훗날 대문사로 이름을 날렸고 오늘날에까지 우리에게 그 명성을 전하고 있습니다.

스승을 찾고 가르침을 따르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먼저 스승 찾기에 나서길 권유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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