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부인은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점점 바라차(무우수) 나무 아래에 이르렀다. 그 때 그 나무는 보살의 위신력으로 가지가 자연히 굽어져 부드럽게 내려 드리웠다. 마야부인이 곧 오른손을 드니 마치 공중에서 묘한 무지개가 서는 듯이 조용히 팔을 펴 바라차 나무의 굽게 드리운 가지를 잡고 허공을 우러러 보았느니라. 그 때 보살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땅에 서서 손으로 바라차 나무 가지를 부여잡았을 때 2만의 하늘 옥녀(玉女)들이 마야부인 앞에 와서 두루 에워싸 합장하고 함께 마야부인에게 아뢰었다.

부인께서 이제 낳으실 아드님은/능히 생사의 수레바퀴를 끊으리니/위와 아래 하늘과 인간의 스승으로/정녕코 짝할 이 없어라.

그는 모든 하늘의 태(胎)로서/능히 중생의 괴로움을 뽑으리라/부인이여, 고달퍼 마시라/우리들이 함께 부축하리다.

그 때 보살은 그 어머니 마야부인이 땅에 서서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은 것을 보고 태중에서 생각을 바로 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느니라.(중략)보살이 탄생하자 사람의 부축 없이 곧 사방으로 거닐며 각 방면으로 7보를 걸었고 걸음마다 발을 들면 큰 연꽃이 솟아났다. 7보씩 걷고 나서 사방을 둘러보며 눈을 깜짝이지도 않으며 절로 입에서 말이 나왔다.

이 세간 가운데/내가 가장 높구나/나는 오늘부터/목숨받는 일이 끝났네.”

〈불본행집경〉‘수하탄생품 中’

오늘은 불기 2558년 부처님 오신날입니다. 과거 모든 부처님이 정토에서 성불하여 그곳에 안주하였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오탁악세인 인간 세상, 즉 예토(穢土)에 태어나 뭇 중생을 제도하셨습니다. 〈불본행집경〉 ‘수하탄생품’에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셨는지 그 장면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수하탄생품’을 보노라면 부처님이 예토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룸비니 동산은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연의 화응(和應)과 평화로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경전은 부처님을 ‘하늘의 태’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던져 줍니다. 즉 중생들에게 삶의 자양을 대는 자애로운 어버이이자 휩쓸리거나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잡게 해주는 스승이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자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라 칭하는 연유가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부처님이 정토를 마다하고 예토에 나투셨는지 그 이유를 묻는 장면이 〈비화경(悲華經)〉에 나옵니다.

적의(寂意)보살이 부처님께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이 더럽고 추악하고 부정한 세계인 오탁악세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시고, 사생의 중생들에게 삼승법을 설하게 되었으며, 무슨 인연으로 이와 같은 청정한 세계를 취하지 않고 다섯가지 흐리고 나쁜 세계를 멀리하지 않으셨나이까?”

부처님은 적의보살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본원력(本願力)으로써 청정미묘한 나라를 취하기도 하지만, 또한 본원이기 때문에 짐짓 청정하지 않은 국토를 취하기도 하느니라. 무슨 까닭이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대비를 성취하였으므로 이러한 부정토(不淨土)를 취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나도 본원력으로써 이 부정한 사나운 세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 것이니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이유는 다름 아닌 대비심과 본원력에 있다는 것입니다. 본원력은 대비심이 바탕이 됩니다. 대비심이 있으므로 본원력을 발하게 되고 본원력을 실현하기 위해 대비심을 낸다는 게 부처님의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본원력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경전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생들로 하여금 나[我]가 없고 내것[我所]이 없음을 모두 알게 하고,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퇴전하지 않음을 얻게 하여지이다. 일체중생이 모두 평등하게 같이 화생(化生)하게 하며, 세계가 청정하여 미묘한 향기가 가득하게 하여지이다. 일체중생이 모두 32상을 성취하여 각각 스스로 빛나게 하옵고 네 가지 변재를 얻어 무량불토의 갖가지 장엄이 그 가운데 나타나게 할지어다.”

부처님의 본원력은 이어 모든 중생이 기쁨과 안락과 삼매의 경지에 노닐도록 더욱 넓혀집니다. 중생에 대한 무한 자비, 무한 사랑이 경전을 통해 진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본원력이란 중생을 부처로 나아가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무명의 삶에서 각자(覺者)의 삶으로, 분별의 삶에서 화쟁의 삶으로, 어리석은 삶에서 지혜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본원력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본원력에 따라 부처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부처님을 닮도록 치열한 정진을 해야 한다는 게 이번 법문의 결론입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불자님들 모두 부처님과 태를 잇고 있는 공덕으로 한량없는 환희심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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