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최근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석촌동 세 모녀 자살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또 경기도 광주에서는 한 가장이 방 안에 번개탄을 피워 13살 딸과 4살배기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딸은 지체장애 2급이었습니다. 동두천에서는 30대 주부가 어린 아들을 안고 아파트 15층에서 투신하였습니다. 정말로 우리 사회를 안타깝게 하는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세계적인 석학으로 알려진 프랑스 사회학자 기 소르망 박사가 4월 초 한국을 방문해 기부에 인색한 한국사회를 질타했습니다. 그의 저서 〈세상을 바꾸는 착한 돈〉은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돼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기부문화가 발달돼 있는 미국에 머물면서 그가 체험하고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기 소르망 박사는 “한국은 아직 복지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특히 노동시장이 너무 불평등하다는 데 주목하고 있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미래가 보장되고 교육비를 대지 못해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적 경제적 약자를 위해 당파와 상관없는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부란 이 시스템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하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주는 영역이라고 강조합니다.

실제 생활고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현재의 사회복지시스템 안에서 어떠한 혜택도 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자살 소식이 들릴 때마다 이런 저런 긴급제도들이 거론되지만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기에는 여전히 예산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기부문화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기부문화를 주도해 온 종교입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시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보시정신(布施精神)은 어려운 이웃의 삶을 살피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남을 이롭게 하는 보살행을 강조하면서 육바라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보시는 육바라밀에서도 첫 번째로 강조되고 있는 덕목입니다. 보시의 실천은 생천의 과보를 가져온다는 교설과 관계가 깊습니다. 불교에서 기본적으로 말하는 보시는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재가자에게는 재시(財施)라는 물질적 베풂이 강조되고 출가자에게는 법시(法施)라는 정신적 베풂이 강조됩니다. 또 중생들이 안고 있는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도 아주 중요한 보시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은 고통과 절망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얼마 전 광주 지역에서 발생한 남고생의 자살과 관련해 언론에서는 그 학생이 자살 고위험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담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미루어 ‘법시’와 ‘무외시’가 매우 소중한 가치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절망과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은 금전적 가치로 따질 수 없는 배려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무외시입니다. 또한 정신적 베풂 역시 진정한 행복과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일깨워 주는 것으로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목입니다.

보시와 관련한 본생담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전생에 토끼의 몸을 받아 수달과 들개, 원숭이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포살일을 맞아 각자 계를 지키고 보시를 하고자 다짐하였습니다. 때마침 탁발승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수달은 어부가 감추어 둔 물고기를 가져와 보시했고 들개는 농부의 집에 가서 고깃덩어리를 물고 와 보시했습니다. 원숭이는 망고나무에서 망고를 따 보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탁발승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었습니다. 토끼는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속에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보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탁발승은 천신이 변장한 것으로 장작불도 토끼의 보살정신을 시험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토끼는 털끝 하나도 타지 않았습니다. 천신은 토끼의 보시정신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달 속에 토끼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이때의 수달은 아난, 들개는 목련, 원숭이는 사리불, 토끼는 바로 부처님이었습니다.

불교에서는 나와 인연이 닿지 않는 존재란 없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의 세계관 삼법인(三法印) 가운데 제법무아(諸法無我)란 바로 이를 일깨우는 진리입니다. ‘독립된 나’란 없습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그물망처럼 서로가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업중생(共業衆生)입니다. 따라서 이웃의 자살은 단순히 나와 떼어져서 논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과거 보시정신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데 기여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이타행이 활발히 펼쳐져야 하겠습니다. 기 소르망 박사의 ‘세상을 바꾸는 착한 돈’이란 다름 아닌 ‘무주상 보시’일 것입니다. ‘무주상(無住相)’이란 ‘머무는 바 없는 모습’의 뜻으로 ‘주었다’는 마음조차 내지 않는 것을 일컫습니다. 이러한 보시정신이 바탕이 되면 우리 사회의 아픔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무주상 보시를 널리 실천해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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