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최근 불교계 안팎으로 명상이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본래 불교에서 말하는 명상은 마음을 완전히 건강하게 하여 평형을 이룬 고요한 상태, 즉 삼매(三昧)에 이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런데 30여 년 전 인도의 명상가 크리슈나무르티와 라즈니쉬 등이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 명상에 대한 그릇된 오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가 명상을 현실도피로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일상적인 생활의 일과에서 벗어나 사회와 격리된 어떤 곳, 이를테면 절의 토굴이나 암자 등지에서 도를 닦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둘째는 명상이 그 어떤 초월적인 힘을 안겨주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상을 함으로써 깊고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면 보통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갖게 되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얘기입니다.

30년이 지난 오늘날엔 이러한 오해가 많이 불식된 듯 보입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현실도피나 초월적 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명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명상에 대한 편견이 줄어 든 예입니다.

이렇듯 편견은 그릇된 사고를 낳는 주범입니다. 편견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회적 부작용과 구성원 간의 갈등은 때로는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편견이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그릇된 사고를 진실인 양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종편견, 종교편견, 지역편견, 장애편견, 문화편견 등 우리사회에는 각계 제방면에서 편견의 부작용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들어와 다문화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는 외국인들, 그 중 국가의 경제가 우리보다 못한 동남아시아 이주민들은 이웃의 편견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이웃으로 대해주었으면 하길 바라지만 생각과 문화가 다른 하급동물처럼 여기는 데 서글픔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심리학 용어로 ‘편견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편견으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을 다섯 가지 단계로 적시한 것입니다.

1단계가 ‘적대적인 말’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편견의 대상을 향해 처음에 욕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은 이런 편견을 수반한 속담이라 할 수 있습니다.

2단계는 ‘회피’입니다. 편견이 강해지면 욕을 하는 단계에서 마주치기를 거부하는 회피단계로 나타납니다. 결혼상대에서 제외시키거나 친목도모마저 거부하는 상대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3단계는 ‘차별대우’입니다. 대상에 대해 직접적인 적대행위를 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단계입니다. 이러한 예로 직장 고용을 거부하거나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는 행위 등이 있습니다.

4단계는 ‘신체적 공격’을 가하게 됩니다. 인간의 편견이 얼마나 무섭게 진전하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단계입니다. 편견대상을 심하게 배척하고 위협해 생활권에서 사라지도록 합니다. 실례로 편견 속에 배척당한 사람들끼리 한 곳에 모여 사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보이고 있습니다.

5단계는 ‘몰살’입니다. 가장 강도가 심한 경우에 나타나는 형태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0년대 있었던 ‘보스니아 내전’입니다. 특히 보스니아 내전이 진행되던 1995년 세르비아군에 의해 이슬람교도 8,500여 명이 집단 학살된 스레브레니차 사건은 ‘인종청소’로 회자되며 지금도 인류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같은 편견을 엄하게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4성제 8정도를 통해 ‘정견(正見)’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정견이란 눈으로 보이는 것을 바르게 보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현상과 본질을 모두 바르게 파악해 ‘알아차리라’는 당부입니다. 그래서 <대승장엄경론>에서는 “중생은 가명(假名)에 의해 있는 것이지 실유(實有)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나’, ‘너’, ‘우리’ ‘존재’ 등을 말할 때 방편적으로 쓰이는 것이지 엄밀히 따져 궁극적 진리로 말하자면 ‘나’, ‘너’란 ‘가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궁극적 진리의 세계는 너와 나를 분별하는 일이 없음에도 중생들이 분별을 일으켜 차별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분별심이 편견을 불러 일으키고 이러한 편견이 그릇된 사고를 양산해 냄으로써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불교적 견해라 할 수 있습니다.

정견은 세계관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기도 합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삼법인으로 얘기되고 있습니다. 이를 잘 살펴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것이 정견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편견은 우리가 가장 경계하고 지양해야 할 요소입니다. 무엇보다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편견은 가장 타파해야 할 1순위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품 안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차별받거나 그릇된 존재로 인식돼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단견(斷見)마저도 부정되는 불교에서 편견이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불자 여러분의 정진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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