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50년 4월 초파일「부처님 오신날」에 새삼 되새겨 보아야 할 의미를 찾아 본다.
원래 불교에는 유일한 정답이란게 없다. 화살이 박히는 곳 모두가 과녁이고 아무데고 찍는 점 전부가 원의 중심이다. 이 것이 바로 진정한 도(道)의 포용이고 불교라는 자비 문중의 존재 방식이다.
불교는 유마거사와 달마대사의 침묵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침묵의 언어'가 그처럼 육중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렇다고 오늘의 이 절박한 대한민국이라는 시공에 오신 부처님도 침묵으로만 일관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한 마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쏠림 현상들을 중화(中和)의 미로 극복하라고.
좌로, 가난한 자에게로 쏠리기도 하고 경상도 · 전라도로 쏠리기도 한다. 쏠림의 현상들이 빚어내는 갈등과 대립은 양극화라는 단순 논리로 수렴돼 정치적 색채까지 띄고 현란한 공중전을 전개한다. 이를 일거에 날려버리기 위해서는 불가의 전가보도인 양변(兩邊)을 버린 중도가 곧 부처라는 진리의 칼을 꺼내들 수밖에 없다.
뮤지컬을 통해 북한 인민들의 처절한 인생역정을 보고 듣고나면 차마 말을 이을 수 없는 침묵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침묵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올해의 4월 초파일 부처님 법문은 아무래도 ‘한쪽으로만 기운 쏠림 현상을 바로 잡자'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모든 침묵의 뒤에 숨어 있는 이 한마디를 부처님 법문으로 대신할 수 밖에 없다. 올해 초파일에는 허공에 말뚝을 박는 양극화 논리를 거두고 부처님 법으로 너와 나를 감싸 안는 광명의 등불을 밝히자.

<금강불교 제 3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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