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의식
신뢰사회 만든다



지난달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3년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에서, 우리 국민의 최우선 관심사는 역시 건강과 경제상황으로 나타났다. 더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가치를 묻는 질문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가장 많이 꼽았다. 경제발전, 기회균등 및 공정성의 확보, 사회집단 간 소통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또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전체의 23%, 즉 네 명 중 한 명꼴로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불행의 근거를 들여다보면, 사람 사이 또는 집단 간 신뢰부족이 중요한 이유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올해 첫날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3’에서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한국인은 22% 정도에 불과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이용하거나 해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신뢰지수 22%는 OECD 평균(32%)보다 낮은 수준이고, 1위인 노르웨이의 60%, 덴마크나 스웨덴의 50%대에 비하면 우울한 수치다.
신뢰 없이 행복은 없다. 믿지 못할 사람들에 둘러싸인 불안한 상태에서 행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사회의 갈등은 OECD 국가 중 둘째로 깊고, 사회갈등 비용이 GDP의 1/4에 해당한다는 보고도 있다.

불신은 불통·불편을 낳고, 불안을 가중시켜 결국 불만·불행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간, 또 화장실이나 상담 창구에서 앞사람과 거리를 두면 끼어들까봐 바짝 붙어야 할 것 같은 조마조마함, 저축은행 사태와 같은 혼란기엔 고위층만 먼저 낌새를 알아채고 먹튀를 해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는 힘없는 서민들의 허탈감 같은 유전무죄 유권무죄식 불평등은 우리 사회를 불신과 냉소로 몰아넣고 있다. 정치권은 이해관계를 조화롭게 중재하기보다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본연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고, 종교계도 영혼의 구제는커녕 이익에 휘말려 오히려 사회갈등의 진원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수준을 높이는 데서 그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 전체의 정의와 공익을 위해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의식 없이 신뢰의 사회, 행복한 국가는 요원하다. 요즈음 예상 관람객 천만을 바라본다는 영화 ‘변호인’에서 사무장은 불의에 맞서 어려운 길을 걷는 주인공 변호사에게 “편한 인생 네 발로 걷어찬 거”라며 안타깝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 주인공은 “그러니까, 내 아들 딸들은 이런 세상에서 살지 않게 하려고 이러는 겁니다”라며 당당하게 외쳐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하였다.

혼자만 살겠다면 다함께 죽기 마련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내 몸은 아무리 작은 부분의 작은 아픔일지라도 온몸이 함께 반응한다. 우리 몸 전체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연결돼 있다.” 어느 아르헨티나의 작가의 말이다. 부처님의 연기세계 역시 같은 가르침이 아닌가. 존재하는 어느 하나도 내 일부 아닌 것이 없다는 우주정신을 향하는 사회만이 불신의 늪에서 나와 희망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를 생각하는 원론적인 해답보다 때론 나 자신만의 현실적인 해결도 함께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 “믿을 만한 짓을 해서 믿는 게 아니라 믿어주면 믿을 만한 행동을 하게 되며, 행복해서 웃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 웃고 감사해야 행복해진다”는 단순한 진실을. 신뢰와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니까.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