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로 인한 휴식 식민화
삶의 문제로부터 도피 고착
자아 독립 정신 연마해야

‘소비’란 무엇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핵심적 개념인 소비는 구체적 시기마다 계속 바뀌어왔다. 초기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대중의 소비를 의식주 해결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소위 ‘선진국’(세계체제 핵심부)의 대중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덜 고민하게 된 1920~50년대에는 할리우드영화부터 텔레비전까지 그들로 하여금 소화하기 쉽고 친근한 이미지들을 소비케 했는데, 이는 동시에 대중들의 의식을 통제하기 위한 훌륭한 수단이 됐다. 1950~70년대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의 자동차나 여행상품 소비는 대중들에게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든가 ‘이질적 공간을 이제서야 볼 수 있다’든가 각종의 환상을 심어주면서 사실상 자본에 의한 대중들의 휴식시간 식민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의 아시아나 중동, 남미의 저임금노동자들이 만드는 제품들이 ‘선진권’의 시장에 대거 밀려오면서 물질적 소비는 상대적으로 저렴해지고 그 위상은 격하된 반면 소비의 중심은 이미지 소비에 고착되고 말았고, 여기에서 최근 몇 년 사이에 핵심으로 부상한 것이 컴퓨터와 휴대폰을 ‘퓨전’ 시켜놓은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을 통해 가능해진 것은 일종의 ‘전적인’ 완전한 소비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물건이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도 스마트폰은 인생 전체를 ‘부담 없이 즐거운’ 소비과정으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삶이나 실존이 안겨주는 모든 문제들을 다 도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발품 팔아 시장에 가서 가게주인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할 것 없이 모든 쇼핑은 스마트폰으로 부담 없이 당장 OK! 도서관에 가서 책 구하고 거기에서 얻은 지식으로 어떤 체계를 만들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수립해보려는 노력도 구석기 시대처럼 먼 일이고,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된다! 불안과 과로, 불합리한 권력관계에 지쳤다고? 역시 스마트폰으로 인기 동영상 몇 개 보고 기분 전환하면 될 일이다. 특정한 몇 사람과 우정을 쌓고 서로의 즐거움과 고통을 나누고 깊고 오래갈 인간관계에 지나친 ‘시간투자’ 할 것도 없이, 스마트폰과 SNS를 통한 메시지, 사진 공유로 친근함에 대한 나의 욕구를 대충대충 만족시켜줄 수 있다. 시간이 조금 남으면 역시 스마트폰으로 게임 좀 하고. 결국 스마트폰이 나에게 모든 것을 매개하면서 ‘세상’ 전체를 대체하게 된 셈이다.

물론 그 어떤 스마트폰도 경제 공황이나 정치적 보수화, 권위주의로의 회귀, 다수 근로인구의 점차적 빈곤화와 만성화된 불안과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스마트폰 이외에 아무것도 제대로 모르고 세상과의 모든 소통을 스마트폰으로 하는 데에 익숙해진 ‘스마트폰형 인간’은 타자들과 연대할 수도 없고 주류에 맞설 만한 자기만의 생각을 체계화시킬 능력도 없어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통신비를 꼬박꼬박 내도록 안간힘 다 쓰고 대충 순응하면서 스마트폰을 계속 즐길 확률은 아주 높다.

스마트폰으로 인해서 가능해진 모든 것의 소비화, 모든 소비의 종합화·간소화는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완전한 도피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디지털 노예 상태야말로 자본이 우리에게 가장 강하게 바라는 바가 아닐까 싶다. 아,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만 해도 그 첫 단계는 스마트폰없이 며칠이라도 살 수 있게끔 자아 독립 정신을 스스로 연마하는 게 아니겠는가? 팔정도(八正道) 실천 이전에 ‘스마트폰으로부터의 해방’이 먼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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