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 실천하면 열반 언덕 이를 수 있어”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절 안의 돌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찰에는 무엇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습니다. 전각 벽에 그려져 있는 벽화에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불자들은 법당에서 참배만하지 벽화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25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불교는 긴 세월을 거쳐 오면서 많은 설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설화들은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신앙에 관한 이야기,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 교리에 관한 이야기, 고승들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 등 종류와 수가 방대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하고 지침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벽화로 그린 것입니다.

불교에서 인생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안수정등(岸樹井騰)’이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 단양 구인사 설법보전 외벽에 있는 '안수정등' 벽화.


광야를 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무서운 코끼리가 나타나 쫓아옵니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 속에는 나무넝쿨이 늘어져 있었고, 그 사람은 넝쿨을 잡고 우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채 내쉬기도 전에 밑을 보니 사나운 용이 입을 벌리고 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레에는 네 마리의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밖에는 코끼리가 지키고 있으니 나갈 수도 없고 오직 나무넝쿨만 움켜쥐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나타나서 나무넝쿨을 갉아대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위에서 꿀이 떨어져 입술에 닿자 그는 달콤한 꿀맛에 취해 자신의 처지를 잊고 맙니다.

여기서 광야를 가는 사람은 중생의 모습이고, 고독한 모습이지요. 광야는 중생이 윤회하는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 육도를 뜻 합니다. 무서운 코끼리는 목숨을 앗아가는  살귀이고, 우물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며, 네 마리의 뱀은 인간의 몸인 사대(四大) 즉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말합니다. 나무넝쿨은 중생의 생명줄을 말하고,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의 시간을 말하며, 꿀은 중생들의 앞에 펼쳐진 오욕락(五欲樂)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잠시의 오욕락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常〕 즐거움의 착각〔樂〕, 존재의 착각〔我〕, 깨끗함의 착각〔淨〕이 더 있습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 바로 이것입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생자필멸(生者必滅).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고,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이렇듯 인생은 무상(無常)하고 제행(諸行)은 무상인 것이며 제법(諸法)은 무아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설하셨던 것이 고(苦), 집(集), 멸(滅), 도(道) 사성제인데 그 가운데 고성제는 인생은 고(苦)라는 것입니다. 생, 노, 병, 사의 근본 사고(四苦)를 이야기하고 여기에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득불고, 오온성고의 네 가지를 더해 인생이 팔고(八苦)임을 설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우리 인생에 대해 고(苦)라고 결론지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인생에 행복이란 것이 없고 고만 있다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이해하면 저절로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고성제가 인생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라면, 집성제는 그것의 원인 분석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渴愛)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갈애의 근본 원인은 바로 무명, 즉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움을 겪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苦)라는 것에 대한 원인 분석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그 괴로움을 벗어난 상태인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멸성제입니다. 열반(涅槃)이란 괴로움을 벗어난 적정과 안온이 있는 참된 행복의 상태를 뜻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괴로움의 이 세상을 차안(此岸)이라고 했고, 참된 행복이 있는 열반의 세상을 피안(彼岸)이라고 했습니다. 바라밀은 곧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열반의 언덕으로 가는 방법이 바로 도성제입니다. 도성제는 팔정도(八正道)를 말합니다.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을 떠난 중도를 말하는 이 팔정도를 실천하면 반드시 열반의 언덕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바르게 노력하는 한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모두 실천할 수 없지만 조금씩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다 보면 우리도 부처님같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노력의 실천만이 고해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우리의 밝은 미래가 보장된 불국토로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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