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일본 집단주의
거짓 주장 수천만 동원해도
진리 앞세운 개인 압도못해

지난 8월 중국 오대산과 주변 불교성지들을 참배했다. 한국교수불자연합회에서 주관한 ‘문수보살 상주처 오대산과 운강석굴 5일’ 성지순례에 동참했던 것이다.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일생에 한 번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중국 오대산이었는데 그 최고봉인 3,058m의 북대 영웅사와 2천년 전통의 현통사 등에 참배할 수 있었던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또한 중국 선불교의 거장인 조주선사(趙州禪師)가 주석하던 백림선사(柏林禪寺)와 임제선사(臨濟禪師)가 주석하던 임제사를 방문하여 선풍의 자취를 느껴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조주선사는 많은 선문답(공안)을 남긴 선승으로 유명하다.

오늘날에도 선객들이 많이 들고 있는 무자(無子)화두는 조주의 선문답에서 나왔다. 한 승려가 조주 스님에게 찾아가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더니 “없다(無)”고 답변했다. “부처님은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 열반경)고 하셨는데 어째서 없다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했더니 조주 스님은 “업식성(業識性)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니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냥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업식성을 버리지 못해 없다는 것이니 논리적 답변이기도 하다. 그러나 간화선에서는 이 선문답에서 무자 하나만을 화두로 삼아 머리로 분별하지 말고 의심이 타파될 때까지 사무치게 의심하라고 가르쳐 왔다.

만일 조주의 선문답을 간화선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고 용수보살의 중론(中論)과 같이 명제를 세우고 증명해 나가는 논리적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어찌되었을까? 개의 불성에 관한 문답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지, 불성이란 무엇인지, 생명을 왜 존중해야 하는지 등 생물학과 인간학 분야 등에서 지난 천백여 년 동안 수많은 연구업적이 나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 사이에도 엄청난 차별이 존재했던 당시의 중국사회에서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씀은 큰 정치,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천한 짐승인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무조건 없다고 대답하면 부처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있다고 대답하면 개와 사람을 같은 부류로 취급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조주 스님은 조건부로 없다고 답하여 당시 인심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문답의 뜻을 참구해서 스스로 깨닫도록 했던 것 같다.

조주 스님이 오늘에 계신다면 나는 스님에게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을 것 같다. 조주선사의 답은 역시 “없다(無)”일 것이다. 나는 다시 “19세기 이래 세계는 개인 대신에 국가, 민족, 계급 혹은 정당 등 집단이 사람들의 중요한 삶의 원리가 되었는데 스님은 왜 집단에 불성이 없다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조주 스님은 “업을 짓고 받는 것은 개인이지 집단이 아니다. 집단은 개인의 집합에 불과하며 그 자체 정신이 없기 때문에 불성도 없다”고 답하셨을 것 같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집단의 결정에 맡기고자 한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 일정 부분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해도 진리냐 아니냐는 머릿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거짓 주장은 수천만의 지지자를 동원해도 한 개인이 밝히는 진리를 압도할 수는 없는 것이 진리의 세계이다. 불성은 개인에게 있는 것이지 집단에는 없기 때문이 아닐까? 중국과 일본 등 집단주의 문화 속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참구해 본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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