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 스님은 지계
원효 스님은 무애
올 대선에 맞는 인물은?

신라 시대 자장 스님은 ‘율사’다. 진골 출신인 부친은 아들을 낳으면 출가시키겠다고 서원하며 천부관음을 조성하였고, 어머니는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사월초파일 그를 낳았다고 전한다. 아버지를 여읜 뒤 고골관(枯骨觀)을 닦던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려 하자 “내 차라리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 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라며 응하지 않자 왕이 어쩔 수 없이 출가를 허락했다. 당에 유학했을 때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으나, 선덕여왕이 당태종에게 자장을 돌려보내달라는 편지를 써 귀국하였다. 이후 분황사 9층탑을 건축하고, 통도사를 창건하며 금강계단을 마련하여 국가로부터 ‘대국통(大國統)’으로 임명되었다.

진표 스님은 자장율사보다 백여년 뒤에 태어났으나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교법을 전해받고, 법상종을 개종하여 율사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또 대연진(大淵津)에서 용왕으로부터 옥과 가사를 받고 금산사를 중창하는 등 이적이 많은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 스님은 성사(聖師) 또는 해동보살이라 불린다. 그는 당 유학을 가던 중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진리를 깨달아 ‘일심’ 사상을 강조했고, 분규와 갈등이 심했던 불교계를 화합시키고자 ‘화쟁론’을 주장했으며, 민중들에게 ‘나무아미타불’만 열심히 염불해도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특별한 규율이나 제도에 속박되지 않고 자재로운 삶을 살았던 그의 행동은 흔히 ‘불기(不羈)’ 또는 ‘무애’라는 말로 요약된다.
자장 스님과 진표 스님은 계율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철저했다. 그에 반해 원효 스님은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대중교화와 자비실천에 앞장섰다. 계율은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어떤 경우라도 그것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율사적 입장이다. 그에 반해 계율이란 것도 궁극적으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위한 것이므로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성립한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칼날같이 시퍼렇게 계율을 지키는 율사보다 무애행을 행하는 스님들을 더 많이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멀게는 원효에서 시작하여 근대의 괴각 경허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무애행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고 왜곡된 형태로 일반인에게 회자되었고, 일부 승려들은 자신이 그 후예인 양 파계적 행위를 정당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효와 경허의 경지가 아무나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들의 무애행의 속내 또한 함부로 운위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승단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사회에서는 규칙을 엄격히 지키는 이보다 그렇지 않은 이가 출세하고 이름을 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주된 화제는 대선이다. 벌써 대선에 나서겠다고 밝힌 인사가 열 명이 넘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호언하지만, 이제까지 얼마나 원칙과 규율에 충실한 삶을 살았는지 의문스럽다.

정치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봉사행위다. 말로는 국가와 국민을 내세우면서 사리사욕을 위해 원칙을 어기고 변신을 거듭해온 정치꾼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식민지와 민족전쟁을 겪고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자랑스러운 국가의 국민이다. 우리가 더욱 강하고 부유한 국가로 성장할 것인지 이 상태로 머물다 주저앉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노력과 선택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인물유형이 자장인지 원효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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