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뜨거운 여름철이 되면서 모든 초중고가 방학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학이라고 해서 부모의 역할을 소홀히 해선 안 될 것입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사회생활 속에서 부모의 사람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인생항로와 목적지를 찾는데 부모 만큼 좋은 본보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랜 옛날 나침반이 발명되기 이전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가야 할 길을 찾았습니다. 지금처럼 자체적으로 항해 지도를 갖추지 못했을 때의 배들은 등대의 불빛으로 바닷길을 여행했습니다.

요즘은 네비게이션이 목적지를 안내합니다. 초보 여행자일지라도 네비게이션만 있으면 주저 없이 집을 나섭니다. 그렇다면 네비게이션이 없는 인생의 길은 어떻게 걸어가야 할까요?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분석하고 예측하며 인생항로를 개척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성공한 이 보다 실패의 쓴 맛을 보게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승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입니다.

최근 정신적 스승 역할을 하며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길을 안내하는 이를 ‘멘토’라 부르며 스스로 그 제자 됨을 자처하는 ‘멘티’가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일례로 대학입시를 앞둔 입시생들을 위해 학교에서는 자고(自高) 출신의 명문대생들을 멘토로 지정하여 명문대 진학률을 높이고 있는 게 그 한 예입니다. 방송과 신문도 예외는 아닙니다. 가수 배우 지망생을 위한 ‘멘토링’제를 경쟁적으로 도입해 시청률 제고에 열중이고, 신문들은 저마다 ‘멘토링 체험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멘티’와 ‘멘토’의 관계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과 ‘그 가능성을 믿어주는 것’으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가능성을 믿어주면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합니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가의 이름입니다.

키프로스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여성을 혐오합니다. 그의 혐오증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겠다고 다짐하게 합니다. 그는 어느 날 상아로 여자를 조각했는데 너무 아름다워 그 작품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연인을 대하듯이 조각에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 보석 반지를 끼워주었으며 목에는 진주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임무를 끝낸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 신전 앞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신이시여! 저 상아 처녀를 제 아내로 점지해 주소서.” 그의 정성에 감복한 아프로디테는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피그말리온이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누인 조각을 보자 생기가 돌았습니다.

1925년 노벨문학상 1938년 아카데미 각본상에 빛나는 조지 버나드 쇼(1856~1950)는 이 신화에서 힌트를 얻어 희곡 ‘피그말리온’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교육을 통해 인간의 품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빈민가의 꽃 파는 소녀를 6개월의 언어 교정을 통해 귀부인으로 만드는 과정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 희곡의 내용처럼 전혀 딴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스승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관계가 깃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면 효과를 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인생의 ‘네비게이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구비유경〉 ‘도장품’에 이런 말씀이 전하고 있습니다.

“선량한 사람을 채찍질하고 죄없는 사람을 거짓으로 모함하면 그 갚음은 끝내 용서가 없어 열 가지 재앙을 받는다. 살아서 못견딜 고통을 받고 몸을 다쳐서 불구가 되며 저절로 병이 들어 괴로워하고 낙담하여 정신이 혼미해진다. 항상 남에게 모함을 받고 혹은 관청의 형벌을 받으며 재산을 송두리째 잃게 되고 친족들과 멀리 떠나 산다. 가진 집은 모두 불타고 죽어서는 지옥에 들어가나니 이것이 열 가지 재앙이니라.”

믿지는 못할 망정 거짓으로 모함까지 하게 되면 받아야 할 과보가 이렇듯 끔찍합니다. 따라서 사람과의 관계는 ‘믿음’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해 늘 신뢰하고 공경하게 되면 상대방 역시 나를 따르고 신뢰로서 보답하므로 좋은 일만 가득 생기게 됩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관계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현행 우리 사회에서 소통의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이유도 사실 불신이 팽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과 주장만을 내세우는 세태는 단절을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므로 공허한 메아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 가치로 다가섭니다. 

부처님을 ‘삼계도사 사생자부(三界導師 四生慈父)’라 하는 것은 그 가르침의 절대적 신뢰에 누구나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나침반과 등대가 길을 안내하듯 부처님 가르침이 성공의 길로 인도하므로 우리는 부처님을 믿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믿듯 사람과의 관계를 ‘믿음’으로 이루어 보십시오. 늘 좋은 일만 따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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