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  무 원 총무원장직무대행

불자 여러분!

화창한 봄날씨가 연일 이어지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계속돼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학교폭력, 자살, 토막살인 등 입에 담기조차 버거운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라며 혀를 차지만 우리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이 언론 지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참으로 서글프고도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또는 알고 싶지 않다고 해서 외면만 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로선 해법을 찾아 사람들에게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신조차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몸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어요.”

인간에겐 다중인격장애라는 병명이 있습니다. 즉 한 사람에게 여러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연쇄방화범, 성폭행범을 검거하고 보니 지극히 평범한 시민이어서 놀라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입니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순간적인 심리적 충동에 의해 방화범이 되기도 하고 성폭행범이 되는 게 인간입니다.

1999년 워싱턴 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강간상해로 체포된 빌그린은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그린의 정신상담 및 치료를 담당하던 정신과 의사 메리 산티니니는 법원에 유죄판결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의아했습니다. 빌그린에게 참혹하게 강간당한 피해자가 바로 산티니니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산티니니는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빌그린이 자신을 강간했을 때 다른 인격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법정에서 증언합니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사회의 폭발적 관심을 끌었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다중인격장애라는 정신질환은 더욱더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 원인도 다양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복잡다단해지는 사회구조에 의해 인간도 복잡한 심리형태를 띠는 데 따른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 가운데 가장 빨리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 또한 변화의 중심에 있다 하겠습니다. 외모를 가꾸는 기술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으며 심리를 포장하는 위장술도 심층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자연은 인간과 달리 태초의 순일(純一)한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일깨워 주는 가르침이 불교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 한 수좌가 운문화상을 찾아와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습니다. 이 수좌의 질문에 운문화상은 “나무는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고 천지에 가을바람만 가득하다”고 답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인데 이것은 하나의 공안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불전은 부처님의 법문을 ‘순일(純一)’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수식이 없습니다. 진실 그 자체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또한 기교가 없으므로 순일하다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이와 같이 순일해야 체득됩니다. 수식과 과장과 가식이 없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순일해야 ‘참 나’를 보게 됩니다. 운문화상은 이 점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자연이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본체를 당당히 드러내듯이 인간도 순일한 상태가 되어야 우주 법계와 맞닿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 한 재가자가 찾아와 명예와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그에게 “명예를 얻고자 한다면 계율을 지키시오. 재물을 얻고자 한다면 보시를 행하시오. 덕망이 높아지고자 한다면 진실한 삶을 살고, 좋은 벗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은혜를 베푸시오. 그러면 그대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요”라고 대답합니다. 부처님의 이 말씀은 순일하게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깨끗하고 가식 없이 살라는 당부입니다.

순일한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든 당당할 수 있습니다. 그를 누가 위해하고 모함한다 해도 진실이 바로 드러나므로 언제나 평화롭습니다. 순일한 사람은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며 언제나 원칙과 대의를 좇습니다. 위선과 가식이 방편이란 명분으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데 쓰여진다면 순일은 어떠한 유혹과 위협에도 흔들림 없이 정의롭게 처신합니다.

순일하지 않으면 참선을 아무리 많이 하고, 불공을 열심히 해도 공덕을 쌓지 못합니다. 상대방을 감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불사를 밤낮으로 해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달마대사는 한마디로 “없다”고 말합니다. 상(相)을 드러내서 하는 온갖 선행은 순일하지 않으며, 그 공덕은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순일한 사람은 안과 밖이 다르지 않으니 ‘내 몸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둡고 침울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우리 불자들이 항상 여여한 마음으로 누구에게나 따뜻하게 대해봅시다. 그 순일함이 이웃들에게 감동을 안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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