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 그대로 파악하는
불교 인명논리학만이
복잡·다변 세계 반영

불자들이 독경하는 〈반야심경〉은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니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라 하고 원효대사는 “둘을 융합하였으나 하나가 아니다(融二而不一)”라고 한다. 성스러운 말씀이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명제(命題)라고 생각하기 쉽다. 서양논리학으로 보면 그렇다.

위의 명제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초를 세운 서양논리학의 동일율(同一律)과 모순율(矛盾律)에 어긋난다. “A는 A”이지(동일율) “A이면서 동시에 비(非)A가 될 수 없다(모순율)”는 것이다. 상반된 명제들 중에서 하나를 인정한다면 다른 하나는 부정되어야지 어떻게 양쪽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가? 둘을 융합하면 하나이지 왜 하나가 아닌가? 이런 의문들이 제기된다.

그래서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논리학뿐만 아니라 불교논리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양논리학은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A는 계속 A이고 A가 아닌 B가 되는 것을 모순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논리학은 변화가 적은 세계, 단순한 세계에서는 잘 통하지만 변화가 크고 복잡한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의 인명논리학은 사물이 늘 변화하고죂無常죃 실체가 없다죂無我죃는 실상에서 출발한다. A가 A인 것은 찰나뿐이며 곧 다른 것으로 변한다고 본다. A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B도 될 수 있고 C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진리는 찰나멸(刹那滅)의 독자적 실재를 바로 아는 지각(知覺)으로만 인식된다죂現量죃. 사물의 공통성을 파악하여 아는 개념적 지식은 2차적인 인식으로서 진리가 될 수는 없으며 추리죂比量죃에 의해 현실과의 합치여부가 판단될 뿐이다. 인명논리학의 목적은 착각과 오류 추리를 가려내고 바른 인식수단으로 실제를 있는 그대로 깨닫고 해탈하는데 있다.

진나(陳那 Dignaga)가 기초를 세우고 법칭(法稱 Dharmakirti)에 의해 집대성된 불교의 인명논리학에는 서양의 삼단논법과 유사한 삼지작법(三支作法)이 있다. 종(宗)ㆍ인(因)ㆍ유(喩)가 그것이다. 여기서 종은 논증되어야 할 명제이다. 인은 이유 또는 원인이다. 유는 종과 인의 관계를 나타내는 비유다.

예를 들면, “〈종〉저 산에 불이 있다. 〈인〉연기(煙氣)가 있기 때문에. 〈유〉연기 있는 곳에는 불이 있다. 마치 아궁이와 같이, 불이 없는 곳에는 연기가 없다. 마치 호수와 같이”라고 논증한다. 연기가 나는 곳에 불이 있음을 추론하여 저 산에 불이 났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다. 서양논리학의 삼단논법과 유사하나 다른 점은 형식이 아니라 실제를 중시하며 명제 속에 불명확하고 범위가 막연한 단어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학은 오랫동안 서구인들에게 비정상적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불확정성의 원리와 상대성이론 그리고 퍼지이론 등의 발견으로 그 동안 서양에서 변칙적 논리학이라고 외면하던 인명논리학의 약점들이 오히려 장점임을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인명논리학과 비슷하게 불확실한 양상을 수학적으로 다루는 퍼지이론은 오늘날 세탁기, 온수기, 에어컨 등 전자산업분야, 의료기가 분야, 로봇사업 분야 등 광범위한 산업에서 활용되고 있다.

서양논리학은 합리적 부분만 다루기 때문에 현상에서 배제되는 부분이 많아서 불확실성과 복잡계를 다룰 때 엄청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자 하는 인명논리학은 복잡성과 변화를 다룬다. 〈반야심경〉과 원효대사의 법문은 논리적 오류와 착각이 아님이 인명논리학으로 논증될 수 있는 명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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