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 사명은 실천수행
고통받는 이 제도하는 것
신념·성의로 솔선수범해야

지난 세기는 과학적인 사고 위에서 모든 것을 실증적으로 그 원리와 근거를 제시해야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과학만능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교의적이거나 신념의 총화로 여겨지는 종교는 어쩌면 비과학적이므로,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그에 관한 신뢰도 점점 줄어들어 마침내 쇠멸될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현대는 이러한 과학적인 도식을 벗어나 인간성이 중요시되는 정신문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종교계를 살펴보더라도 윤리와 마음을 주로 다루는 동양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다. 즉,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서 물질과 육체적으로는 풍요로워져 생활에 여유가 많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소외와 정신적인 갈등 등을 배가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이성을 신뢰하고 마음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인 것이다.

불교의 사명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류공통의 염원, 곧 현재의 불행과 불안에서 벗어나 마음을 편안히 하면서 일상의 생활을 믿음직스럽게 영위하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세계를 습득케 하고, 의지를 가지고 꾸준히 정진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포교(布敎)이다. 이것은 교의를 홍포(弘布)한다는 의미로서, 어느 종교이든지 간에 생명과 같이 귀중한 실천 덕목이다.

그렇다고 하여 맹신하면서 포교하는 것은 금물이다. 근래에 사회 일각에서 맹신 때문에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무조건 자기 종교만을 강조,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종교인의 자세가 아니다. 왜냐하면 맹신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굴뚝 신심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며, 중도에서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경향이 다분히 많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성을 중요시한다. 이성은 깨달음의 본바탕인 불성과도 같다. 나아가 마음의 본성으로도 비유되는데, 그 세계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크기는 허공과도 같고 깊기는 깊은 바다와 같기 때문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이것을 증득하고 있으므로, 쉽게 남을 헤치거나 경거망동(輕擧妄動)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마치 모든 것에서 허상을 취하지 않고[不取於相], 마음이 그저 그래서 쉽게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如如不動]. 지혜의 경지가 바로 부동(不動)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일부 종교인들이, “더러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면서, 서로 질투하고 싸우는 모습을 본 후에 거기에 가기가 싫어졌다”거나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의 행동과 밖에서의 행동이 다르기 때문에 가기가 싫어졌다” 등의 비난을 명심해서, 자신을 올곧게 낮은 데로 간직해야 살아 있는 포교가 되는 것이다. 성인들의 가르침만 있고 이를 본받아서 실천할 사람들이 없다면, 그 말씀은 한낮 금언에 불과하다.

말법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불교인들은 무엇보다도 교의에 따른 실천수행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개도(開導)해야 하는 적극적인 포교 자세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모든 사람들이 매사를 올바로 인식하고, 참다운 수행을 할 때에만 지혜가 밝아져서 개인이 행복하게 되고, 이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목표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포교는 항상 그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에, 신념과 성의를 가지고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이 불교인의 자세라 여겨진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