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가치에 의거해
정치적 견해 밝히는 것
중생 구하는 참된 길

불교의 지향점이 아무리 출세간적인 성격이 강할지라도, 그것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불교는 다양한 경로를 우회해서라도 역사의 각 단계에서 중생들이 직면하는 사회적 고민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고민의 해결을 향한 출발점은 중생고의 해결이라는 불교 내부로부터의 요구일 수도 있고, 공동체라는 외부의 요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한국의 불교계는 아직도 이 양 측면에서 오는 불교적 해결책의 요구나 압박에 초연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수행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이 독실한 재가신도의 길이라는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동급생을 자살로까지 몰아가고 있는 학교폭력 문제로 온 나라에 비상이 걸리고, 대책마련에 부산해도 비폭력 불살생의 가훈을 자랑하는 이 가문은 침묵하고 있다. 공공성을 상실하고 사유화 된 국가권력이 중생들의 삶을 초토화시키고, 국격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도 상생과 화합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구현할 방향과 원리에 대한 사자후는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남의 일일 뿐이다.

전통적인 가족 유대를 유린하는 맞벌이와 윤리교육을 포기한 성취지상주의 가치관으로 무장한 대가로 달성한 소득 20,000불 시대는 우리의 기대처럼 좀 더 행복해진 사회가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을 폭력의 공포 속으로 내모는 사회로 현전되고 있다. 행복한 삶을 위해 더 많은 소유를 추구할수록 우리는 다음 세대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기막힌 역설의 구조 안에 갇혀있는 꼴이 되었다. 이러한 고민들은 생사문제의 해결과는 관련이 없는 문제들이라 불교인들은 침묵해야하는 주제인가?

출가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수행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중생들이 고통 받는 현장을 의식적으로 피하거나, 그 원인이 정치문제이기 때문에 외면하는 것도 살아있는 종교의 수행자다운 행동으로 보기는 개운치 않은 일이다.

승려가 권력 담당자가 되려하거나 권력에 기생하여 종권을 잡으려는 행위, 불사라는 미명으로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행위 등은 당연히 엄금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참정권을 가진 주권자로서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거나 현재의 권력이나 잠재적 권력자들에게 중생들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치관과 권력행사 방법 및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것은 결코 탓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조언은 당파성에 기초한 세간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불교적 가치와 원칙에 견주어 검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대상에 대한 상해·수탈·악구 등은 본질적으로 중죄이기 때문에 정제되어야 하고, 참회해야 한다.

정치는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고, 정치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사회구조는 개개 구성원들의 삶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 성격의 일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참정은 건강한 민주주의 유지기재이다.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꿈 꿀 수 없는 사회를 물려주면서 정토를 논하는 것은 자기기만이요, 위선이다. 일상화된 폭력에 불교계의 침묵은 집단적인 파계의 다른 모습이다. 이제 이 무자비한 사회와 연기적 안목이 결여된 구성원의 일탈에 대하여 복발(覆鉢)의 경고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