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 청소년 심성순화
구체적 안전장치 마련으로
학교폭력 근절 도모하자

학교 친구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이 사회를 흔들어 놓고 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밤낮으로 늘 불안에 떨어야 했던 숨진 K군의 유서를 읽으면서 가슴이 미어져 눈물을 훔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엄마, 언제 와”라는 문자메시지가, 교사인 어머니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시달리던 K군의 “나 지금 매맞고 있어요”라는 신호였다니, 우리 모두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괴롭힘을 혼자 감당해 보려고 몸부림치다 가해학생이 보낸 문자 “니(너) 내일 죽인다. 내일 찍소리 말고 맞아라”에 답하는 대신 가족들에게 절절한 유서를 써놓고 죽음을 택했던 K군을 살려내지 못한 자책감에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죽을 만큼, 아니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워 아예 죽음을 택한 아이들은 왜 교사나 부모에게 말하지 못했을까. 잘못되면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가혹한 폭력이 상상되는 마당에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서다. K군도 친구가 담임교사에게 알리기 위해 교무실로 찾아갔을 때 “나 맞아 죽는 거 보려느냐”며 말렸다고 하니 얼마나 두렵고 괴로웠으면 그랬겠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미성년자 성폭행 나영이 사건, 장애인 성폭행 도가니 사건, 그리고 학교폭력 대구중학생 사건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죄 없는 선량한 학생들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아니겠는가. 어린 학생의 목숨 하나 보호도 못해 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나라가 선진국가가 될 수는 없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민망하다.

자식을 키우는 이 땅의 그 어느 누구도 학교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바로 내 아이가 죽음까지 생각할 만큼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피해자일수도, 한 친구를 죽음으로, 그 가족을 파멸로 몰아가는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사회적 경고라는 말이다. 이제 우리 모두 구체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지체 없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한다.

먼저 폭력을 휘두른 가해자에 대한 납득할 만한 처벌이 우선이다.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처벌이 없거나 미미할 경우 잘못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폭력을 반복하게 하여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는 셈이 될 수도 있다. 관용은 어떻게 피해를 입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양자가 서로 인정하고 나서야 있을 수 있는 인간적 미덕이다. 폭력 학생들은 “장난으로 재미로 그랬는데...”라고 말하면 학교가 문제 삼지 못하는 것조차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의 결과가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고 갔다면 응분의 처벌을 받는 것이 가장 교육적인 것임을 학생, 학부모, 학교 모두 잊어서는 안 된다.

가정과 학교에서 구성원들 간 대화와 소통, 그리고 인권의식 제고 등 타인을 배려하는 인성교육 역시 장기적인 안목으로 세밀히 챙겨야 한다. 폭력과 지배 대신 자비와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계가 정부와 손을 잡고 문제 청소년들의 심성순화에 적극 나서는 것도 생각해 볼만하다. 성적서열과 입시문제에만 매달리는 학교에만 우리 아이들의 교육을 맡길 게 아니라, 교과부가 적정한 예산을 세우고 종교계가 그 또래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행한다면 학생들에겐 억지 자원봉사 등 스펙 쌓기보다 더 유익한 사회교육 사업이 되지 않을까 싶다.

K군의 명복을 빌며, 전국의 학교폭력 피해가족들에게도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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