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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원각국사(圓覺國師) 덕소(德素)
  • 최기표 금강대 불교/복지학부 교수
  • 승인 2011.09.0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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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태종으로 출가, 국사 오른 첫 승려

   

선(禪)과 교(敎)의 겸수를 표방하는 고려 천태종을 창건한 대각국사는 본래 교종인 화엄종 승려였고, 그의 뒤를 이어 천태교학을 전한 교웅(敎雄)은 선종으로 출가하여 참선을 익힌 선승 출신이었다. 천태종으로 출가하여 이들이 전한 법을 전수 받아 국사에까지 오른, 입문부터 천태종 승려인 첫 인물은 창종주 대각국사의 법증손(法曾孫)뻘이 되는 원각국사(圓覺國師) 덕소(德素)이다.

덕소는 고려 예종 시대 정해년(1107) 3월6일에 당시 지방장관을 맡고 있던 부친 담양 전(田)씨와 남원 출신인 모친 양(梁)씨 사이에 태어났다. 덕소가 태어나던 날 모친은 수도 개성에서부터 덕소의 부친이 다스리는 주(州)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수레가 길에 가득한 꿈을 꾸었으니 부모는 그가 귀한 자식임을 알고 이름을 자미(子美)라고 지었다. 자는 혜약(慧約)이다.

태몽의 예지대로 자미는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특히 그가 태어나기 7년 전에 입적한 대각국사를 흠모하여 그가 수집, 출판해 놓은 많은 불전을 정독하면서 천태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승려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을 “국청사의 정원(淨源)”이라고 소개하였다. 국청사라면 천태종의 본산이 아닌가. 자미는 반가와 하며 그 승려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치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와 같이 친숙하였다. 마침내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정원을 따라가서 천태지관을 전하고 있던 교웅(敎雄)의 문하에 출가하였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때의 일이다.

교웅은 당시 장단(長湍)의 화장사(華藏寺)에 머물고 있었다. 대각국사가 입적한 뒤 국청사에서 복강사(覆講師)로서 천태교학을 전하다가 한 종장의 시기로 홍주 백암사로 밀려난 지 7년 만에 원명국사의 천거를 받아들인 예종의 명으로 도성 근처로 주석처를 옮긴 것이다. 자미를 제자로 받은 교웅은 그가 아직 어리지만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수행에도 열성적인 모습을 보고 항상 “우리 종단을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이 사미일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이후 덕소(德素)라는 법명과 함께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된 뒤에도 교웅은 늘 그를 가까이 두었다.

개성에 큰 가뭄이 들어 예종의 청으로 비를 기원하는 법회를 연 것을 계기로 교웅은 궁을 출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덕소도 스승을 따라 궁궐을 출입하다가 예종의 장자로서 훗날 인종으로 등극하는 태자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덕소보다 두 살 연하인 태자는 덕소와 뜻이 잘 맞아 궐 밖의 사찰에 갈 때는 늘 그를 부르곤 하였다. 어느 날 함께 사찰에 참배를 갔다가 우연히 대장경을 모셔 두는 대장당(大藏堂)에 들어가게 되었다. 태자는 상자를 열어 손에 잡히는 대로 불전을 꺼내어 덕소에게 건네주니 덕소는 건네받은 불전마다 잠시 읽어본 뒤 그 뜻을 막힘없이 밝게 설명해 주었다. 태자가 감탄하면서 “이 승려는 훗날 반드시 대법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뒤 6년이 되는 해에 치러진 대선(大選) 승과 시험에서 덕소는 22세의 나이로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인종 13년(1135)에 교웅의 법계가 대선사로 오르면서 덕소는 스승을 따라 국청사로 옮겨 갔다. 국청사는 본래 천태종의 본산으로서 지어진 사찰이었으나 교웅 이후 26년간 천태학 설법주가 없다가 교웅이 복귀하면서 다시금 활발하게 천태교관이 연찬되기 시작하였다. 교웅의 문하로 학도들이 왕성하게 모여드는 가운데 덕소는 그들의 상수로서 스승의 전법을 도왔다. 덕소 또한 점차 명성이 퍼지고 법계가 올라가면서 슬하에 문도들을 받게 되었다.

덕소가 36세가 되던 인종 20년(1142)에 교웅이 입적하였다. 향년이 67세이니 그리 급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대사찰 국청사를 맡을 큰 인물이 없어졌다는 점에서 천태종단으로서는 충격이 컸다. 결국 대각국사의 급작스러운 입적으로 젊은 교웅이 국청사를 지켜낼 수 없었듯이 덕소 역시 아직 법랍이 적고 법계가 낮다는 한계로 인하여 국청사를 떠나야 했다. 자세한 전후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교웅이 입적한 다음 해 봄에 덕소는 문도들을 떠나보내고 단출한 몸으로 산수를 유력하다가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울주의 영축산에 이르러 석장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궁벽한 곳에 있다 하여도 덕소의 덕행은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어서 사방에서 많은 학인들이 법문을 들으러 모여 들었다. 이곳에서 얼마간 생활하다가 덕소는 다시 태자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인종의 부름을 받고 도성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울주에서 개성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배를 이용하게 되었다. 항해 도중에 검은 바람이 일어 노한 파도가 태산 같이 몰려오니 뱃사람들이 모두 공포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였다. 하지만 덕소가 담담하게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독송하니 잠시 뒤 하늘이 청명해지며 파도가 잠잠해져서 모두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 삽화=강병호 화백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종   시 덕소에 대한 신망이 두터워 덕소가 47세 되던 의종 7년(1153)에 법계를 선사(禪師)로 승급시켰고 2년 뒤에는 가사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갑신년(1164) 여름, 날씨가 오래 가물자 의종은 대화궁(大和宮)에서 경을 설하는 법회를 개최하고 덕소를 법사로 초빙하였다. 덕소가 강경을 시작하자 큰 비가 쏟아져 밭과 들이 완전히 해갈되었다. 인종이 국정 시찰을 위해 멀리 행차하는 여정에 덕소가 수행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왕은 덕소에게 승직을 수행할 만한 고승을 천거하기를 청하였는데 그가 천거한 승려들은 모두 직분에 적합한 인물이어서 왕의 신망이 더욱 두터워졌다. 궁으로 돌아가는 도중 황해도 평산에 머물 때 의종은 덕소의 법계를 선종 승계 가운데 가장 높은 대선사(大禪師)로 승진시켰다.

의종의 뒤를 이어 동생인 명종이 즉위하였다. 왕은 자문을 구할 왕사(王師)를 선발하고자 하였으나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선종과 교종의 여러 고승 대덕들의 명단을 각각 적은 봉투를 만들어 불상 앞에 안치해 두고 엎드려 기도를 하였다. 이후 봉투 하나를 취하여 역대 선왕들의 진영 앞에서 개봉하니 ‘덕소’라고 적힌 봉투였다. 이것이 부처님과 선왕의 뜻이라 여긴 명종은 덕소를 왕사로 추대하고자 하였으나 덕소는 완곡하게 사양하였다. 이에 명종은 자신의 처남인 승통과 우복야 직에 있는 박경서(朴景瑞) 등을 보내어 왕의 뜻을 전하게 하였으나 덕소는 계속 덕이 부족하다며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이 계속 하여 사신들을 세 번이나 보내면서 간청하자 덕소는 왕의 뜻이 간절한 것을 알고 결국 왕사 직을 수락하였다. 명종이 즉위한 해 11월에 예를 갖추어 덕소를 왕궁으로 맞았다. 출가 승려들과 여러 신하들이 나아가 삼배를 올리고 왕사로 모시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 날 각 종파의 고승들을 초빙하여 백고좌(百高座) 법회를 열었는데 향을 올릴 때 임금이 먼저 덕소 앞에 나아가 공손하게 절을 드린 뒤 자리에 오를 정도로 지극한 공경심을 드러내 보였다. 덕소를 왕사로 추대한 뒤 명종은 덕소를 궁으로 초빙하여 법회를 열기도 하였고 혹은 덕소가 머무는 곳에 찾아가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 영동 영국사에 있는 원각국사 덕소탑비.
명종 4년(1174) 11월에 덕소에게 병세가 나타났다. 왕은 소식을 듣고 친히 건강에 좋은 음식을 챙겨 병석에 왕림하였다. 또 우복야를 보내어 탕약을 올렸으나 덕소는 약을 물리치고 자리에 다시 앉아 가부좌를 하고 참선을 하였다. 왕은 “이것이 스님이 평소에 지니고 있는 마음가짐”이라고 찬탄하였다. 이날 덕소를 시봉하는 승지(承智)선사에 명하여 덕소왕사를 모시고 궁 밖의 의왕사(醫王寺)로 옮기게 하였다. 그러나 덕소는 궁을 나온 지 하루 만에 서쪽을 향하여 바르게 앉아 합장을 한 채 입적하였다. 왕은 부음을 듣고 비통해 하며 장례를 후하게 치를 것을 명하니 송악산 서쪽 기슭에서 다비하여 유골을 양산(陽山) 지륵산(智勒山)의 영국사(寧國寺)에 안장하였다. 일찍이 덕소가 “지륵산은 산 높고 물 맑아 수행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자주 말하던 것에 따른 것이다.

앞서 덕소가 병에 걸렸을 때 궁인이 꿈을 꾸었다. 수많은 승려들이 “여래께서 열반하시는 때”라고 하면서 옷이 흰색으로 변하여 학림(鶴林)을 이루더니 유해를 둘러싼 채 공중으로 올라 서쪽으로 사라지는 내용이었는데, 꿈을 꾼 지 하루 만에 덕소가 발병하였다는 것이다.

덕소는 평소 병이 없고 옷을 검소하게 입으며 설법과 독경 이외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덕소의 제자로는 입적 당시 선사에까지 오른 승지를 비롯하여 1200여 명을 헤아리는 많은 이들이 있다.

덕소가 입적하고 6년이 지난 뒤 원각국사(圓覺國師)라는 시호가 추증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탑비가 영국사에 세워졌다. 명신 한문준(韓文俊)이 찬한 이 비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의 영국사 경내에 남아 있지만 마모되고 깨어져서 내용을 온전하게 읽어낼 수가 없다. 비문에는 산 이름을 지륵산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언제부터인지 천태산(天台山)으로 불리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최기표 금강대 불교/복지학부 교수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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