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태풍 ‘메아리’가 심술을 부리고 지나갔습니다. 이번 태풍에도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재해가 잇따랐다는 소식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늘 소통의 단절과 안일한 대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태풍이 온다는 기상청의 예보를 간과했거나 허술한 대응이 화를 불렀던 과거의 전례를 이번에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불시에 닥쳐 와 미처 손쓸 겨를도 없이 속수무책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악조건과 불시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준비된 이는 이를 슬기롭게 피해가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준비된 이’란 다름 아닙니다. 자신에게 다가 올 향후의 일에 대해 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대응 매뉴얼을 몸에 익혀놓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날 일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이와 관련된 정보를 어디에서 입수하며 이를 또 분석하여 내 매뉴얼로 만든다는 것이 수학문제 풀 듯 공식화돼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알고 보면 ‘준비된 이’가 되기란 매우 쉽습니다. 여러분의 귀를 항상 열어 두십시오. 귀를 열 줄 알면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귀가 열렸다는 것은 주위의 의견을 잘 들을 줄 안다는 의미와도 상통합니다. 특히 소수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진지함과 정당성이 있다면 존중하는 것이 귀가 열려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반대로 귀가 닫혀있는 사람은 아집과 독선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하여 화를 부르고 엄청난 피해를 대중들에게 안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돼지만 참사의 비극을 알고 계십니까?

1961년 4월 어느 날, 여덟 척의 미군 함정이 쿠바 남쪽 해안 돼지만(Pig’s Bay)을 향해 출항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턱 밑에서 입 안의 가시처럼 행동했던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출항한 1,400명의 상륙부대는 쿠바 연안의 암초에 걸리거나 공군 전투기에 의해 격추당하였고 그나마 상륙을 감행한 100명의 부대원도 쿠바 경비대에 의해 사살됐습니다. 결과적으로 돼지만 참사 이후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은 더욱 견고해졌고, 미국과 소련은 핵전쟁의 심각한 위기까지 몰렸습니다. 왜 이런 결과를 부르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알아보면 바로 이 계획을 주도한 정부 당국자의 닫혀있는 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의 협조 하에 미국 본토를 겨냥한 중거리 미사일을 도입하겠다는 쿠바의 계획에 위협을 느낀 케네디 정권은 미국 내 최고의 엘리트들을 소집해 여러 날에 거쳐 대책 회의를 가진 뒤 쿠바 망명자들, 즉 반카스트로 쿠바인들을 돼지만에 상륙시키자는 결과를 이끌어냈습니다. 여기에는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쿠바의 내부봉기처럼 보일 수 있지 않겠냐는 순진한 발상도 뒷받침됐습니다. ‘돼지떼’처럼 우매한 결정을 내리게 된 이 회의에 대해 훗날 한 참석자는 “말도 안되는 작전을 당장 그만 두라고 경고하고 싶었지만, 회의 분위기에 눌려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고 술회합니다. 이때의 회의 분위기란 가늠해 보건대 귀를 열기 위한 회의가 아니라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을 제압하여 귀와 입을 막은 회의였습니다.

귀를 열지 못한 결과가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안겨주는 것인지 이 예화에서도 짐작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귀를 연다는 것은 소수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등 다양한 의견을 수용해야 한다는 전제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균형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귀는 기능적으로 열려있으나 모든 소리를 다 수용하지는 못합니다. 기찻길 옆에 사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오고가는 기차의 경적음에 둔화되듯이 일상사에 둔감해 있으면 귀는 열려 있으나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귀의 가르침입니다.

“내 이제 감로의 문을 여나니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낡은 믿음 버리고.”

부처님께서 전도를 결심하시면서 들려주는 게송입니다. 여기에서 ‘귀있는 자’는 단순히 청각장애인을 예외로 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깨어있는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말씀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이란 무엇을 이루고자 갈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감로의 문을 여는 첫 단계는 귀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왜 그럴까요? 아름다운 소리를 수용한 귀는 입으로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욕설로 가득한 소리를 내 귀가 반긴다면 내 입 역시 욕설로 더럽혀질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자와 포살의 의식으로 제자들에게 듣고 말하는 중요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우리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귀를 열고 있어야 합니다. 깨어있는 사람의 귀는 잠을 자든 자지 않든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귀가 건강해질 때 언로(言路)가 바로 서고 모함과 질시가 자리잡을 수 없게 됩니다. 더욱이 돼지만 참사같은 어리석은 결정이 또 다시 생겨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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