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 대각국사 수행도량 … 현재는 선학원 사찰

▲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수행한 선봉사 터 위쪽에 있는 선봉선원. 우측 건물이 대각국사비를 모신 비각이다.

경상북도 구미시·칠곡군·김천시의 경계에 금오산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숭오산이라 불렸던 금오산은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고 계곡이 잘 발달된 경관이 뛰어난 산으로, 1970년 6월 한국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명산 중 한 곳이다.

금오산에는 해운사·약사암·금강사·법성사·대원사 등의 고찰과 신라시대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수도한 도선굴,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 오봉동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5호) 등 불교유적이 많다.

금오산 기슭인 칠곡군 숭오리에는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 스님(義天, 1055∼1101)과 그의 제자들이 수행했던  천태도량 선봉사지(僊鳳寺址)가 자리하고 있어 한국 천태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성지로 손꼽을 수 있다.

▲ 선봉사 한 켠에 대각국사비가 서 있다.

마을 어귀에서 자동차로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로 연결된 길을 2㎞ 정도 오르면 대각국사비가 있는 선봉선원에 이른다. 이곳은 등산로이기도 한데, 마을주민들이 걸어서 올라와 대각국사비를 참배하고 내려오기도 한다.

선봉사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사료 또한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다만 1132년(인종 10)에 세운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의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선봉사가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대각국사 당시 선봉사의 위치는 현 위치보다 아래쪽에 있었으며, 부지면적이 약 3만 3,000㎡(1만여 평)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고려시대 왕족들이 천태신앙을 신봉했던 도량이어서 사세가 유지되다가 임진왜란 발발 7년 째 되던 해에 왜군에 의해 전소되어 폐사됐다고 전한다. 1900년 대 초까지 잡초무성한 폐찰이었던 이곳이 다시 살아난 때는 유장렬이라는 사람이 선몽을 꾸고 땅속에 묻혀있던 대각국사비를 발견한 후 선봉사 터 부근에 대각사(大覺寺)라는 사찰을 지은 1922년 무렵이다. 이후 1989년 선학원 소속 성수 스님이 대각사를 인수해 선봉선원(僊鳳禪院)으로 사찰명을 바꿨다. 현재 선봉선원은 국유림 안에 있으며 전통사찰로 등록돼 있다.

▲ 선봉사 대각국사비.

비록 옛 터는 아니지만 이곳이 주목을 받는 건 대각국사비가 있기 때문이다. 이 비는 1132년(인종 10)에 대각국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는데 전체높이가 3.5m, 비신(碑身)은 너비 1.2m, 두께 0.15m, 높이 2.34m이다. 비석의 조형은 귀부 이수가 없으며, 복련(覆蓮, 꽃잎이 아래로 향한 연꽃)과 앙련(仰蓮, 꽃잎이 위로 향한 연꽃)을 각출(刻出)한 직사각형의 대석(臺石) 위에 비신을 세웠다.

둘레에는 당초문을 새긴 개석(蓋石)을 얹었다. 비석 상단에는 전서체로 쓴 ‘천태시조 대각국사비명(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이라는 제액(題額)과 해서체로 정서한 비문(碑文)이 있으며, 비문 양 옆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이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임존(林存)이 짓고 승려 인(麟)이 글씨를 썼다고 기록돼 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비석 곳곳에는 총탄에 맞은 흔적이 있어 서글픔마저 느끼게 하지만, 900여 년 전에 세워진 소중한 유물이 아직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선봉사와 관련된 유물로는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 씨가 선봉사지에서 가져와 소장했었던 3층 석탑(石塔)과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있다. 당시 전문가들은 장 씨의 집을 방문해 두 유물을 조사했는데, 모두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했다. 불상은 좌고(座高) 80㎝, 무릎 폭이 70㎝인 여래좌상이었다. 대좌는 없었지만 배(舟) 모양의 광배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폐사지이건 안타깝지 않은 곳이 없고, 다시 옛 영화를 되찾아 도량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기를 염원하게 된다. 선봉사지는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의 수행도량이었기에 옛 터가 정비되고 다시금 도량이 열려 비석이 제자리에 서기를 기대한다.

▲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진영.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

의천 스님은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다. 11세에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문종 19)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출가, 영통사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때부터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ㆍ율ㆍ논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1067년(문종 21) 7월에는 왕으로부터 우세라는 호와 함께 승통(僧統)의 직책을 받았다. 이에 만족하지 않은 의천 스님은 당시 송나라의 정원법사(淨源法師)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통하여 서로 교유하였다. 그에 따라 송나라 불교계의 동향도 알게 되어 유학의 뜻을 굳히고 부왕에게 알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문족이 죽은 뒤인 1085년(선종 2) 4월 왕과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기고 송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항주(杭州)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의 정원법사를 만나 천태와 현수의 교학에 대해 토론했다.

1086년 6월에 불교전적 3,000권을 가지고 귀국했다. 귀국 후 흥왕사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을 편집하였다.

1097년(숙종 2)에 국청사가 완성되자, 같은해 5월에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했다. 이때 천태종을 개창했으며, 1099년에 제1회 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후에는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하였다. 1101년(숙종 6년)에 개성 총지사에서 47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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