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한 해의 다부진 각오는 봄을 맞는 자세에서 시작됩니다. 봄의 푸르름과 싱그러움을 익혀 자칫 해이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는 것과 아지랑이 같은 신기루에 빠져 마음을 일탈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허망을 좇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거나 값싼 관념에 빠져 정력을 소비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도 허망을 경계하고 현실의 문제를 푸는데 주력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타바루와의 대화입니다. 보타바루가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세계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까?” 부처님이 대답하십니다. “보타바루여, 그것은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보타바루가 또 묻습니다. “그렇다면 세계는 무상한 것입니까?”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보타바루의 형이상학적 질문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세계는 끝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사람은 죽은 뒤 존재하는 것입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보타바루가 진지하게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 일들을 설하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타바루여, 옳음이 없고 법에도 맞지 않으며 수행과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집착을 끊고 욕심을 버리고 바른 지혜를 얻어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보타바루는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무엇을 설하십니까?”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보타바루여, 나는 괴로움을 설하고 괴로움의 원인을 설하며, 괴로움의 소멸을 설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하느니라.”

이어 부처님은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가령 어떤 이가 독화살에 맞았다고 가정했을 때 누가 무슨 원한에 의해 쐈는지, 또 화살의 종류가 무엇이며 독의 종류는 무엇인지를 따지기 보다 중요한 것은 빨리 화살을 뽑아내고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독화살의 비유는 부처님의 사유가 얼마나 현실적이며 체계적이고 지혜로운 것인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실에 대한 냉정한 주시와 노력과 열정을 가벼이 여긴 채 허상을 좇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불자들 중에서도 경전이 본래 가르치려는 의도를 간과하고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신족통, 누진통의 육통을 하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며 도를 닦는다는 이들이 있어 당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육통을 숙달하는 과정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는 것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져 자신만의 관념세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엇을 이루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현실 속에서 사무칠 때 그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여러분은 비틀즈의 명곡 ‘예스터데이(Yesterday)’를 잘 알고 계시지요. 전세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즐겨 부르는 이 노래가 실상은 꿈 속에서 만들어진 곡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1964년 1월 록밴드의 전설 비틀즈의 멤버인 폴 매카트니는 호텔에서 잠을 자다 꿈을 꿨습니다. 그 꿈 속에서 어떤 현악 앙상블을 듣게 되는데, 그 아름다운 선율이 너무나 생생해서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멜로디가 머릿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뒷 날 이 선율이 세계인들이 즐겨부르는 ‘예스터데이’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스터데이’는 우연히 꿈 속에서 주어진 선물이 아닙니다. 새로운 곡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늘 현실에서 농익어 있다 보니 꿈 속에서 반영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비진리, 거짓과 환상의 가설로부터 눈을 뜨게 하려는 가르침이라는 점을 불자 여러분은 잘 새겨 두셔야 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뜻은 바로 아집과 독선, 허위와 불합리로부터 벗어난 존재라는 의미와 상통합니다.

신비와 허상을 좇는 종교와 이념은 한때 세인의 주목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불자들에게 있어서 올바른 믿음이란 삶과 진리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합니다.

부처님 재세 당시 어느 날 허기진 농부가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부처님은 시자에게 농부가 먼저 요기할 수 있도록 음식을 제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을 꿰뚫어 보고 있는 부처님의 법문입니다. 배고픈 이에게 그 어떤 듣기 좋은 법문이라도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있겠습니까?
현실이 허상과 다른 것은 바로 이런 점입니다. 그릇된 허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예언과 점에 의탁하게 되고 결국 자신을 잃게 되는 어리석음을 부르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현명한 사람은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노력하는 팔정도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얻는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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