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라면 누구나 불교의 핵심사상이라 할 연기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외양만 불자일 뿐 연기의 가르침을 가벼이 여기는 분들이 적지 않아 참된 불자의 모습을 지켜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선종하신 테레사 수녀의 일화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빈자(貧者)의 성녀(聖女)’로 알려진 테레사(1910~1997) 수녀는 한때 ‘신의 존재’문제로 고민했었다고 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 콜카타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인물로 전 세계적으로나 우리 불교계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2003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성인의 전단계로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이 된다는 복자(福者)로 추대되기도 했는데 이런 그녀에게도 ‘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고뇌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테레사 수녀가 창립한 ‘사랑의 선교회’ 소속의 한 신부가 몇 년 전 ‘테레사 수녀-나의 빛이 되어라’(Mother Teresa-Come Be My Light)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노벨평화상 시상식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 속,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우리가 주고받는 웃음 속 등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시상이 있기 석달 전 자신의 고해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선 “나에게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예수님을) 보려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그녀의 고민은 이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마치 모든 게 죽은 것처럼, 내 안에 너무나 끔찍한 어둠이 있다”고 퍼디낸드 페리에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고 있고, 로런스 피카키 신부에겐 “내 영혼이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어둠이 있는지 얘기해달라”고 편지했습니다.

성녀 테레사도 독실한 신앙심으로 빈민운동에 일생을 기여했지만 ‘신의 존재’에 대해선 회의와 고뇌가 만만치 않았음을 이 글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하는 일을 곧 ‘신의 역사(役事)’로 받아들여 궁극적 구원을 시도했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에게 구원의 빛을 안겼고 마침내 복자의 계단에 올라섰습니다.

그렇다면 불교계에선 불교사상의 핵심이라 할 ‘연기론’에 대해 얼마나 깊이 신봉하고 있을까요? 기독교계 신자들이 한번쯤은 고뇌해 볼 ‘신의 존재’ 문제처럼 불자들은 ‘연기’가 신행생활과 얼마나 밀접하게 작용하고 있는지 곰곰히 의문을 던져봐야 할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기독교 신자라 하기 어렵습니다. 기독교의 시원이 신에 의한 창조론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불교는 인과에 기초하여 윤회의 고리가 성립하고 이러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부단한 수행정진이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불교교리의 근본은 바로 연기론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도 불자로서 ‘연기’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이비’ 또는 ‘유령불자’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은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 난다’는 얘기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 리 없다’는 것이고 ‘행위가 있으면 그 과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입니다.

더욱이 이같은 연기설을 사회대중 일반에게 가르치고 전법해야 할 의무가 불자들에게 있습니다만 너무 소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사회 지도층이 어느 날 폭력을 폭력으로 대하고 지나친 부를 추구하다가 망신을 당하는 광경을 목도할 때면 연기의 가르침이 엄중히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자책감마저 앞서게 됩니다. 팔만대장경을 전부 전파하는 것이 전법교화는 아닐 것입니다. 나를 현재 있게 하고 나의 존재를 평가하며 훗날 나의 미래를 가름짓게 하는 연기법만이라도 제대로 전해준다면 우리 사회는 보다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사문유관을 통해 왕자 교육을 받던 중 미물에 불과한 한 마리 벌레를 새가 날아들어 쪼아 먹는 것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고 인생을 고민했고, 조선시대 기승으로 더 잘 알려진 진묵대사가 그의 나이 7세 때 모 심던 인부들이 개구리를 마구 때려 죽이는 것을 보고 자비심이 생겨 출가를 결심하게 된 그 일화와 교훈들이 이제 한낱 ‘옛날이야기’로 치부돼서는 안됩니다.

테레사 수녀가 ‘신의 존재’ 문제로 깊은 고뇌를 했던 적이 있듯이 우리 불교계에서도 ‘연기설’에 따른 인과문제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준엄한 것인지를 깨우쳐주는 계기가 주어지길 바랍니다. 특히 불교지도자일수록 ‘연기’에 대한 이론무장이 필요하고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바른 실천행을 보여줘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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