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학 기초 다진 고려 원공국사 머문 도량
② 원주 거돈사지(居頓寺址)

영동고속도로 여주 IC를 빠져나가 원주시 부론 방면 531번 지방도를 타면 거돈사지에 이른다. 서울에서 넉넉잡아 2시간 거리다. 지금은 공사 중이라 531번 지방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정산리 방향으로 가야 한다.
거돈사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에 위치한 한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고려 중기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천태종을 개창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변모했다. 이후 크게 중창된 것으로 추정될 뿐 사료가 부족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거돈사는 신라 말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전기 천태학승인 원공대사가 주석한 곳이기도 하다. 대각국사가 천태종을 개창할 때 천태종으로 흡수된다. 사진은 거돈사지 전경.

대각국사 때 천태종 흡수
거돈사가 천태도량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건 원공국사(圓空國師, 930∼1018년)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국사는 고려 초기 제관의 뒤를 이어 천태학을 고려에 널리 알린 고승이다. 거돈사지에는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한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보물 제78호)가 있다. 이 비는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이 비문에 따르면 원공국사의 속성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자는 신칙(神則)이며 행순(行順)의 아들이다. 937년(태조 20년) 사나사(舍那寺)에 머물고 있던 인도승 홍범삼장(弘梵三藏)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홍범삼장이 그 해에 인도로 돌아가자 광화사(廣化寺)의 경철(景哲)에게 수업하였고, 946년(정종 1년) 영통사(靈通寺)의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
953년(광종 4년) 희양산(曦陽山)의 형초선사(逈超禪師)를 만났고, 954년 승과(僧科)에 합격했다. 959년 오월(吳越)에 유학해 영명사(永明寺)의 연수(延壽) 문하에서 2년 동안 수학, 심인(心印)을 받았다.

961∼968년까지 7년 동안 중국 국청사(國淸寺)의 정광(淨光)으로부터 《대정혜론 大定慧論》을 배워 천태교(天台敎)를 전수받았다. 귀국 직전 2년 동안 전교원(傳敎院)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 등을 강의,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970년에 귀국, 광종으로부터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은 뒤, 금광선원(金光禪院)에 주석했다. 성종은 적석사(積石寺)로 옮겨 거주하게 하고, 호를 혜월(慧月)이라 하였다. 990년(성종 9년)부터 5년 동안 궁중에서 설법하고, 마납가사를 하사받았다. 목종은 광천편소지각지만원묵선사(光天遍炤至覺智滿圓默禪師)라는 호를 더하고, 불은사(佛恩寺)·호국외제석원(護國外帝釋院) 등에서 머물게 하였다. 현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제수하고, 광명사(廣明寺)에 주석하도록 청하였으며, 적연(寂然)이라는 법호를 주었다.

1012년(현종 3년) 왕사(王師)가 됐으며, 3년 후 보화(普化)라는 법호를 받았다. 1018년 거돈사(居頓寺)로 주석처를 옮겼다가 입적했다. 원공국사는 선불교의 경향을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고려 초기의 천태학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종은 국사로 추증하였고, 시호를 원공(圓空), 탑호(塔號)를 승묘(勝妙)라고 하였다.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은 일제시대에 반출됐는데, 광복 후 찾아와 현재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거돈사지에는 원주시가 국·도·시비 2억원을 들여 중요무형문화재 120호 석장 이재순 씨에게 의뢰해 제작한 재현품이 세워져 있다.

9세기경 창건 후 대찰로 변모
산지 가람인 거돈사의 가람배치는 전형적인 신라의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이다. 1968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뒤, 1982년 토지매입을 시작으로 석축공사 등 대대적인 기단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깔끔하게 정비됐다. 1984년 정비 보수공사와 1989∼1992년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발굴조사결과 거돈사는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창건된 후 고려 초기에 확장·중창돼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고, 조선 전기까지 존속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폐사시기는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할 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정비된 거돈사지는 7,500평 넓이에 건물의 배치와 규모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유적지 보존이 잘 돼있다. 사지의 남북을 중심축으로 가운데 중문지가 있고, 중문지 앞에는 축대가 있다. 중문지 좌우에 회랑지가 강당지 기단과 연결돼 있다. 또 금당터, 승방터 등의 유구가 있다. 탑 왼쪽에는 발굴 때 나온 초석, 장대석 등 석부재들을 한 곳에 모아 놓았는데, 규모로 보아 사세가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당(金堂)터에는 전면 6줄, 측면 5줄의 초석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20여 칸 크기의 대법당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당터를 중앙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약 2m 높이의 원형 불좌대(佛坐臺)가 있어 그 위에 앉아 있었을 불상의 위용을 느끼게 한다. 불좌대 주위에는 초석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있다.

불좌대의 구조와 크기로 미루어보면 금당은 2층 건물로, 내부는 층의 구분이 없는 통층(通層)으로 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금당지 뒤에는 강당지가 있으며, 그 뒤에는 승방지가 있다.

▲ 9세기 경에 창건된 보물 제750호 3층석탑. 사각의 기단석 위에 서 있어 웅장함이 느껴진다.

절터 지킴이 신라 석탑
금당터 앞에는 보물 제750호로 지정된 3층 석탑이 우뚝 서 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석탑 양식으로 높이는 5.45m. 아래층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형태로, 기단을 이루는 밑돌·가운데돌·맨윗돌이 각각 4매로 이루어져 있다. 위층 기단은 남·북쪽에 무늬 없는 긴 돌만 세우고 동·서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돌을 끼워 맞춘 방식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돼 있다. 5단의 밑받침을 둔 지붕돌은 두꺼우면서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경쾌해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 옆에 있던 배례석(拜禮石)은 135㎝×85㎝의 크기로, 전면과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상부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돼 있다. 현재는 절터 부근 민가 우물가에 놓여 있다.

탑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원공국사승묘탑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신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이다. 등에는 정육각형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싸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돼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폐교에 당간지주 홀로 누워
사지 왼쪽에는 수백년 된 웅장한 느티나무가 스님 대신 절터를 지키고 있어, 폐사지의 쓸쓸함을 달래준다. 거돈사지에서 마을 쪽으로 200여 미터 아래 왼쪽의 폐교된 정산분교에는 미완성의 당간지주가 있다. 전체길이가 7m에 달하는데, 우뚝 서 있다면 한결 나아보이겠지만, 스러진 거돈사의 운명과 함께하는 듯 땅을 맞대고 누워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당간지주가 일어서는 날, 거돈사도 다시금 살아나 천태법향을 피우지 않을까.

▲ 폐교된 정산불교에 누워있는 거돈사 당간지주.
▲ 발굴 당시 나온 거돈사지 석부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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