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지키고 부모를 섬겨라

 

“성인의 고요함은 고요함이 좋다고 말해서 고요한 것이 아니라, 만물이 그의 마음을 전혀 어지럽히지 못하기 때문에 고요한 것이다. 물이 고요하면 수염이나 눈썹을 비칠 정도로 밝고, 또 평평함은 물의 깊이를 재는 수준기에도 꼭 들어맞아서 위대한 장인도 이를 본보기로 삼았다. 물의 고요함조차도 이렇게 밝은데, 하물며 성인의 마음이 고요한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성인의 마음은 천지의 정묘함을 비춰주는 거울이자 만물의 오묘함을 비춰주는 거울인 것이다. 텅 비어 고요함(虛靜), 무위(無爲) 같은 것은 천지의 기준이자 도덕의 지극한 경지이니, 이 때문에 고대의 제왕이나 성인도 그 경지에서 쉬는 것이다. 이 경지에서 쉬면 마음이 비고, 마음이 비면 내용이 충실해지고, 내용이 충실해지면 질서가 있다. 또 마음이 비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잘 되어간다. 또 마음이 고요하면 작위가 없고, 작위가 없으면 일을 맡아도 책임을 질 수 있다. 또 작위가 없으면 스스로 즐겁고, 스스로 즐거우면 어떤 걱정도 깃들일 수 없고 수명도 길어진다.”

- ≪장자≫ 외편 <천도> -

 

사바세계는 어지럽고 소란하다. 끝없이 다투는 소음으로 천지가 요란하다. 정치가 발달하여 민주주의의 꽃이 화려하고,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현란한 상품들이 즐비하고, 인지가 날로 정교해지고 얻기 어려웠던 지식과 정보들이 한 손에 잡히는데, 어찌하여 세상사 분란과 소음과 오염은 줄어들지 않을까. 아니 날이 갈수록 더해 가는 듯 보이는가.

마음이 고요하지 못해서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려는 관심이나 의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퇴색하기 때문이다. 요란한 바깥 세상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분주한 마음은 다시 그 소란스러운 세상에 분란을 덧붙인다. 이 악순환 속에 사람들의 심신은 지쳐간다.

마음이 고요하다는 것은 어떤 경지인가. 만물이 가히 어지럽히지 못하는 마음의 평정은 어떻게 해야 가능한가. 마음을 아예 쓰지 않는 것이 마음의 고요함이 아니다. 마음 작용의 부정은 살아있는 인간을 생명 없는 초목으로 죽이는 일이다. 마음을 활발하게 쓰면서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어야 가히 마음이 고요하다 할 수 있다. 어찌해야 그런 경지가 성취되는가.

특정 색깔의 가치 기준과 욕망, 이해 관계를 털어 버리면 된다. 이미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특정한 가치관과 욕망들을 비워낼 수 있으면 된다. 특정한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인간을 평가하면, 서로 다른 기준들이 충돌하는 굉음들이 요란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에게 익숙하거나 유리한 기준을 고집하는 한, 세상의 평화는 불가능하다. 자기에게 낯선 기준들은 배척하고 자기 기준과 이익만을 관철하려 든다면 분쟁과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익숙한 기준과 욕망들에서 거리를 두는 일이다. 낯선 관점과 욕구들을 이해하고 용인할 수 있는 마음의 관용을 키우는 일이다. 다양한 관점과 욕구들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넓혀 가는 일이 바로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 고요한 마음에는 만물이 편안하게 깃들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고요한 마음의 위대한 능력이다.

<울산대 박태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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