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마주함은 깨침의 의식을 고양하는 과정

     鹿   柴
     녹    채

   空山不見人  텅 빈 산 사람은 보이지 않고
   공산불견인

   但聞人語響  단지 두런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단문인어향

   返景入深林  석양빛이 숲 속 깊숙이 들어와
   반경입심림

   復照靑苔上  다시금 푸른 이끼 위에 비치네.
   복조청태상


이 시는 당나라 왕유(王維:699-761)라는 시인이 만년을 남전 망천(輞川)에 은거해 살면서 어느날 인근 골자기인 녹채(鹿柴)의 석양 풍광을 읊은 유명한 선시다. 왕유는 성당 시기의 시 · 서 · 화 삼절(三絶)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불교 선학(禪學)에도 높은 경지에 이른 유발 선승이었다.

평소 참선에 심취했던 시인 왕유는 적막한 산 속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다. 고요한 산중에서 석양을 바라본다. 그리고 석양을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긴다. 이같은 석양의 명상을 일상관(日想觀)이라고도 한다. 산과 마주하며 산을 닮는 것, 그것은 곧 본래성을 찾아 나서는 의식의 고양 과정이다. 바로 입정 좌선과 똑같은 깨침을 향한 의식 고양인 것이다.

시인은 인위적인 해석이 필요 없는 자연 공간 속에 몰입해 있다. 시인은 시의 전면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같은 경향은 은둔을 결행한 시인들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왕유는 자연이 지닌 정적의 아름다움을 특히 사랑했다. 「녹채」는 담박한 풍경 속에서 얻은 선적 정신의 평화를 구가하고 있는 선시다. 왕유는 일관된 경물 묘사 속에다 선적인 평안한 마음 상태를 담아냈다. 일체의 감정 토로를 배제한 철저한 사경(寫景)에서 자연에 동화된 시인의 평화로운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선시는 대부분이 자연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찾는 노력을 보여 준다. 구체적으로는 자연에서 일상의 이념을 얻어낸다. 반복되는 자연과 그 자연을 닮은 일상, 예컨대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자는 일상은 자아를 우주 질서 속에 편입시켜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된 경지인 것이다. 왕유는 선을 시에 본격적으로 접목시킨 시인으로서 선의 세계를 시에 잘 담아냈다. 시인이 산수 자연의 생명력을 자신의 영혼으로 재구성한 산수시는 왕유에 이르러 선종과 결합하면서 주옥 같은 선시들을 쏟아냈다.

천리(天理)의 굳센 운행을 직관했던 그는 그 직관의 순간을 단형의 시로 담아냈다. 「녹채」는 현재의 감각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불변의 진리를 드러낸 선시다. 산천은 불변이다. 불변인 것은 사람을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다.

“석양빛이 숲속을 뚫고 들어와 바위를 덮고 있는 이끼를 비치(返景入深林 復照靑苔上)”고 있는 「녹채」는 청태의 ‘靑'이라는 푸른색이 흔히 선의 차가운 적정(寂靜)을 상징하는 색깔로서 미학적 긴장감을 일으키면서 ‘녹채'라는 고유명사(지명)를 잊어버린 시간과 공간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과 시가 결합한 똑 소리나는 심미 정취를 맛보면서 미분화 된 심미적 연속성의 세계인 ‘적정'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
「녹채」는 도(道:불법 진리)를 강압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단지 암시하기 위한 경물만을 보여준다. 텅 빈 산, 두런거리는 소리, 석양, 푸른 이끼 등과 같은 자연 경물들 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맑고 차가운 청한(凊寒)의 무궁한 선미와 공(空) · 적(寂) · 한(閑)으로서 대표되는 선취(禪趣)를 물씬 느끼며 호흡할 수 있다. 이같은 선의 묘사는 마치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고백 보다 연인이 탄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아주는 눈길이 훨씬 감동적인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선미의 ‘청한한 경계'는 통상 맑은 바람 (淸風)과 흰 달(皎月)로 상징된다. 색깔로는 청색이 선의 차가운 적정과 냉엄한 세계를 드러내 준다.

遇乘微雨問叢林  가랑비 맞으며 사찰 찾아가니
洞府淸寒枯木陰  맑고 차가운 골자기에 고목이 그늘졌다.

조선조 중엽 이행(李荇:1478-1534)의「중열(박은)이 영통사 벽에 쓴 시에 차운하여 (次仲說靈通寺壁上韻)」라는 시의 수련(首聯)이다. ‘청한'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해 선적인 정취를 물신 풍기고 있다. 왕유는 또 「향적사에 들러(過香積寺)」라는 선시의 경련(頸聯: 제5 · 6구)에서는 '냉(冷)‘이라는 글자를 통해 차가운 적정의 선경(禪境)을 드러냈다.

泉聲咽危石 흐르는 계곡물은 뾰죽한 바위 밑에서 오열하고,
日色冷靑松  햇빛은 푸른 솔에 차갑다.


「녹채」의 결구에 나온 ‘청(靑)'과 「과향적사」 제 6구의 ‘냉(冷)'은 상황과 경관 묘사에 생동성을 부여하는 시안(詩眼)이면서 냉엄한 선의 세계를 잘 그려낸 형용사다. 시성(詩聖) 두보는 「등고(登高)」라는 시의 전반 4구에서냉엄한 만추(晩秋)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읊어 선미를 돋우었다.


風急天高猿嘯哀  세찬 바람 높은 하늘에 원숭이 울음 서글퍼라
渚淸沙白鳥飛廻  맑은 강가 백사장에 새는 돌며 나는데
無邊落木蕭蕭下  가없는 숲의 낙엽은 우수수 떨어지고
不盡長江滾滾來  다함 없는 장강은 도도하게 흘러온다.

선경(禪境)이란 정욕이 그친 상태다. 가장 이상적으로 정욕이 그친 상태는 ‘자연'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은 ‘모든 것이 저절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석양빛이 숲속으로 비쳐들어 푸른 이끼를 다시 비치는 것 등은 분명히 저절로 그러한 ‘자연'임에 틀림없다.

선에서의 자연은 곧 자유로운 정신 세계, 정신의 자유를 획득한 경계를 뜻한다. 소동파는 『장자』의 자연을 “완전한 정신적 자유의 획득, 곧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됨과 동시에 자기 이외의 사물과도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풀이했고 서진의 곽상(郭象)은 “밖으로 사물을 구함이 없고 안으로 자기에게도 기대지 않는(獨化)” 완전한 경지를 ‘자연'이라고 보았다. 자연은 곧 자유인데 선에서는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강조한다. 왕유는 녹채라는 곳의 석양의 자연 풍광을 묘사하면서 그 묘사 속에다 자유로운 정신의 세계, 맑고 차가운 마음의 평안, 냉엄한 자연의 질서와 하나가 된 정신 세계를 담아냈다.

왕유의 선시 「녹채」는 녹채라는 곳의 공산심림(空山深林)을 통해 공적유심(空寂幽深)한 선적 경계를 묘사하고자 한다. 시의 묘미는 우선 전반 2구에서 동원한 반츤법(反襯法)에 있다. 두 구는 산의 공적함을 묘사하는 데 공산(空山)에 사람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진입시켜 공산의 정적을 깨버림으로서 더욱 적막한 정중동(靜中動)의 공적함을 드러냈다. 숲의 고요는 매미가 우는 소리로 말미암아 더욱 조용하고, 심산유곡의 적정은 새 우는 소리가 있어야 한층 깊고 고요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산이나 숲의 ‘정(靜)'을 더욱 강조하고자 ‘정'과 정반대되는 사람의 두런거리는 소리, 매미 우는 소리, 새 소리 등과 같은 ‘동(動)'을 진입시키는 묘사법을 ‘반츤법'이라 한다. 새소리나 매미 소리 조차도 없는 심산밀림의 고요는 죽어있는 정적(死寂)이며 흑암(黑暗)이고, 얼어붙어 있는 사막이다. 이러한 ‘고요'의 묘사는 시적인 맛이 없고 강인한 ‘정중동'의 생명력을 강조하는 선적 경계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뒤의 2구는 고요하고 어두운 숲속에 어렵사리 밀림을 통과한 한줄기 석양빛을 끌어들여 산림의 적정 속에서 사람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고 자아의식의 혼암(昏暗)을 일순간에 깨뜨려 버린다. 독자들은 여기서 깊고 그윽한 선적인 유암(幽暗)을 십분 느끼면서 “인어(人語)” · “반경(返景)”과 같은 유성(有聲), 유색으로서 선적인 공산(空山)의 무성, 무색(無色)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이른바 색을 통한 공의 설명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경계다.

왕유의 시와 똑같은 시제(詩題)인 배적(裵迪)의 시「녹채」를 보면 녹채라는 곳의 “깊은 밀림 속은 헤아릴 길이 없고, 오직 고라니의 발자국 만이 있을 뿐”이라고 묘사 돼 있다. 녹채는 이처럼 대단한 심산 유곡이었다. 왕유는 이처럼 겨우 고라니 족적이나 보이는 유벽(幽僻)한 녹채라는 곳에서 대자연과 자신이 교감한 복잡 미묘한 감정 체험을 통해 깨친 철리(哲理)를 단 네 줄의 짤막한 5언 율시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왕유는 깊은 숲속을 통과해 들어와 바위 위의 푸른 이끼를 비치는 석양의 ‘광명'이 상징하는 경계를 통해 자신의 심오한 선수행 과정 중의 활연개오(豁然開悟)를 증언하고 있다.

극히 자연스럽고, 간단하고, 함축적인 표현 기법이 동원된 왕유의 「녹채」는 상외지의(象外之意), 현외지음(弦外之音)의 깊은 선리(禪理)를 설파하고 있다. 독자들은 여기서 말해지지 않은 것, 말과 말 사이의 행간(行間)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모든 자연 현상이 순간적인 환각일 뿐”임을 설파, 『금강경』의 “상을 가진 것은 모두가 허망일 뿐임(凡所有相 皆是虛妄)”을 드러냈다고도 한다.

청대의 시인 왕사진은 왕유의 「녹채」는 “순간을 영원으로 승화시켜 유한으로서 무한의 경계를 표현”한 입선(入禪)의 절경이라고 평했다.

 

王維 (699~761)

자는 마힐(摩詰)이다. 불교『유마경』의 주인공 유마힐 거사의 법명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흔히 왕마힐로 불렸고 두보가 시성(詩聖), 이백이 시선(詩仙)으로 회자됐듯이 왕유를 ‘시불(詩佛)'이라 칭하기도 했다.

산서성 영제현 출신으로 진사에 합격해 관계에 진출한 후 벼슬이 우승(右丞)에 이르렀다. 그는 시 · 서 · 화 삼절(三絶)로 유명했고 은퇴 후에는 남전 망천으로 들어가 홀로 앉아 분향 참선하면서 선적(禪籍)들을 암송했다. 이 때 풍부한 시정화의(詩情畵意)와 선취가 물씬한 선시 · 선화들을 짓고 그렸다. 특히 그의 산수전원시는 자연이 지닌 정적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가 대상(境)과 하나되는 ‘심경일여(心境一如)'의 상태를 시 속에 담아 장자의 '심제(心齊)‘와 같은 선가의 '초연 무심‘을 잘 드러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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