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폭염으로 인해 지구촌 곳곳에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이러한 가운데 전운이 감돌고 있는 아프칸 지역에서는 폭탄테러가 발생해 무고한 인명들이 살상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인류의 최대 화두가 평화인데 여전히 갈등과 대립, 전쟁의 기운은 사그러들지 않습니다. 정말로 인류의 평화체제는 요원한 것일까요? 다음의 이 일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30년 전 죽음의 전쟁길이 상생(相生)의 무역길로 바뀌었다고 해서 뉴스의 중심이 된 적이 있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이 맞닿아 있는 국경도시 핑샹이 화제의 그곳인데, 1979년 중국과 베트남이 ‘17일 전쟁’을 벌인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중국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베트남 북부 랑손으로 진격하면서 핑샹에서 치열한 혈전을 전개했습니다. 베트남이 소련과 가깝게 지내는 한편 수십만 화교들을 국경선 북쪽으로 몰아낸데 격분한 중국은 전면전을 개시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군의 저항과 세계 각국의 비난이 쏟아지자 17일만에 중국군은 철군을 단행했습니다.

한때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도시 핑샹은 과거의 전쟁을 잊고 이제 중국과의 교역에 제1의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양국 국민들의 화기애애한 무역교류가 활발하게 이어지면서 하루 3,000여명의 보따리상이 오고가며 트럭행렬이 끝없다고 합니다. 핑샹이 평화의 도시로, 또한 무역의 중심지로 새로이 태어나게 된 것은 ‘전쟁을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양국의 정서가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저 옛날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인도를 여행했던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 스님은 전쟁의 상흔 때문에 휑하니 뒹굴고 있는 유적 조각들을 접하고 한숨을 내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찬란했을 각종 유물 유적들이 침탈과 파괴로 인해 이리 저리 흩어져 있는 광경을 보고 대립과 갈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절감했습니다.

인간들은 정복을 통하여 세상을 지배하려 해 왔습니다.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면 그것이 곧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판단착오였습니다. 세계사가 증명하듯이 어느 소수 민족이라 한들 강대국에 굴복한 전례는 없습니다. 비록 영토가 침해되고 점령당한 시기는 있어도 정신마저 내놓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갈등과 대립관계가 형성되므로 분란이 계속 되었을 뿐입니다.

지금도 세계 인류는 영원한 평화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을 비롯하여 아프가니스탄·이라크·파키스탄 등 도처에 전쟁의 조짐이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적 이유도 있지만 종교적 분쟁도 한 몫 거들고 있는 형태입니다.

일찍이 원효성사는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나 파도와 바다는 둘이 아니다. 우리의 일심에도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이 동시에 있을 수 있으나 이 역시 둘이 아닌 하나이다.”

《대승기신론소》에 나오는 이 말씀은 우리 인류가 어떻게 살아야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구현할 수 있는지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화쟁(和諍)의 정신입니다. 화쟁은 화해(和解)와 회통(會通)의 논리체계를 이르는 말로서 엄밀히 말하면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이어져 온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단적으로는 연기론과 실상론을 바탕으로 하여 특정한 교설이나 학설을 고집하지 않고 비판과 분석을 통해 보다 높은 가치를 이끌어 내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고, 대외적으로는 모순과 대립을 하나의 체계 속에서 다루므로 화쟁이라 하는 것입니다.

지배와 피지배, 가진 자와 못가진 자,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천함과 귀함 등을 따지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화쟁의 원리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중국·소련·일본·영국·독일·프랑스 등 강대국 중심의 국제관계로서는 평화의 방법을 찾기가 난망합니다. 해법은 화쟁의 원리를 인식하는데 있습니다. 화쟁의 원리를 알기 쉽게 개발하고 이해시키며 저변으로까지 그 정신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돼야 할 것입니다. ‘바다와 파도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화쟁이 인류사회에 진정으로 유익함을 안겨준다는 진리를 알게 되는 날 전쟁길이 상생의 평화길로 태어나게 됩니다. 콧대를 높이 세우는 오만함이 얼마나 유치하고 치졸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 어리석음인지 깨닫게 됩니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서구의 철학자 및 사상가들이 동양의 우리 불교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를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화쟁정신을 널리 알리는 일이야말로 불자들의 의무이자 도리라 하겠습니다. 우리 인류가 당면한 공통된 문제를 푸는데 불자논객들의 활약이 더욱 두드러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천태종 정산 총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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