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 여러분!

완연한 봄입니다. 전국 곳곳에 노랑·빨강·하양,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나 우리 눈을 즐겁게 하고, 벌과 나비는 분주하게 오가며 먹을 것을 취하고 꽃들은 그 덕분에 다음 생명을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남을 ‘도와주는 척’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할 일’을 말없이 하는 생명체들이 있어 자연은 제 모습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자연에는 서로 “벌과 나비는 꽃을 찾아다니며 먹이를 가져가고, 그 반대급부로 꽃가루를 옮겨서 다음 생명을 태어나게 하기로 한다”는 계약 같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이 세상 어느 계약서보다도 더 무거운 약속이 있습니다. 자연의 ‘약속’이 깨지고 그래서 봄이 와도 꽃이 피지 않고 겨울이 와도 눈이 내리지 않게 되면 이 세상은 무서운 침묵에 잠기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입적하신 법정 스님은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봄을 이루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봄이 오면 꽃이 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봄이 오게 됩니다. 꽃이 없는 봄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일 대지에 꽃이 피지 않는다면 봄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자연은 큰 문제없이 세상을 지켜오고 있는데, 약속을 가장 잘 안 지키는 생명이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생겨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약속의 중요성을 강조해도 어기는 일이 이어지고 그래서 손해를 보는 사람이 많아지자, 어느 사회에서나 “약속을 어기면 이런 저런 처벌을 받는다”는 관습이 생겨나게 되고 오늘날 이것을 ‘관습법’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이 ‘약속 위반’ 때문에 생기는 문제도 커져가자 이 ‘관습’이 ‘법’으로 규정되어 ‘개인 사이의 약속인 계약을 어기는 경우’에 민사상 책임뿐 아니라 형사상 책임까지 물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법’으로 규정을 해놓아도 약속을 어기고 사람을 속이는 일은 사라지지 않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지난 3월 말에는 속세를 등지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기도만 하면서 살아가는 수녀님들이 머무는 수녀원의 이전 공사를 맡은 어떤 건설업자가 수녀님들이 세상물정에 어둡다는 점을 악용해 실제 공사비보다 크게 부풀려 수십 원 억을 가로챈 사건이 검찰에 적발되어 구속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런 어두운 소식이 우리 마음에 상처를 주는가 하면 법적 구속력이 하나도 없는 수십 년 전의 약속을 지키고 떠나신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지난 달 입적한 법정 스님은 1971년에 써서 1975년에 낸 산문집 《무소유》와 1983년에 낸 산문집 《영혼의 모음》에 담긴 글 〈미리 쓰는 유서〉에서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요!’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입적을 앞두고 작성한 유언장에서 상좌에게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옛날 봉은사 시절] 내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해주면 고맙겠다”고 당부한 것입니다.

법정 스님의 상좌들도 은사스님의 뜻을 따라, 40여 년 전 봉은사 다래헌에 머무시던 법정 스님께 신문을 전해드리던 주인공을 찾아내서 책을 전달해, 법정 스님이 수십 년 전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약속을 지키는 일은 약속의 당사자들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그래서 세상을 더욱 향기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어기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속이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남의 몸을 더럽게 하고 마음과 입에 신용(信用)이 없어 그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입을 더럽게 하고, 그 몸도 천신(天神)에게서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온갖 선(善)의 근본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어리석고 깜깜하게 만들어 착한 길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선행(善行)의 근본을 단절하게 됩니다.”(《법원주림》)

불자 여러분!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이웃이 서로 약속을 잘 지켜온 덕분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서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빨간 신호등이 켜져 있는데도 마구 차를 출발시키거나, ‘우측통행’의 약속을 무시하고 자기만 ‘좌측통행’을 고집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학생을 열심히 가르치겠다”는 약속을 하고 선생님이 된 사람이 자기 연구와 학생 지도는 소홀히 하면서 자기 이익을 탐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민중의 지팡이가 되겠다”는 약속을 한 경찰관들이 자기 직무를 소홀히 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서약을 한 군의 장교들이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천태종 춘 광 감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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