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광탄 보광사에 갔다. 공양시간이 지나서인지 한적한 산길을 오른 나와 아내는 대웅보전에 가 절을 했다. 평소 같으면 삼배로 끝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삼배를 넘기고도 계속 절을 하면서 속으로 숫자를 셈했다. 열흘 후 아들 녀석이 치를 시험을 위한 백팔배였기 때문이었다. 절을 하는 동안 지난 여름에 다쳐 채 아물지 않는 무릎의 상처가 아파왔지만, 중단할 수는 없었다. 숫자를 세며 나는 무엇을 위해 절을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11월 12일, 수십만의 수험생이 수능 시험을 치른다. 그들을 위해 가족과 친지들이 여러 형태로 기도와 축원을 할 것이다. 전국의 사찰과 교회, 성당, 그리고 영험하다고 소문난 기도처는 송곳 하나 꽂을 틈조차 없을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는 것도 그 때문이다.

수험생 가족과 친지의 한결같은 기도는 “우리 아이 수능시험 잘 치르게 해 주십사”하는 것일 터이다. 그런데, 나는 평소 그 기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해왔다. 그 기도의 이면에는 “남의 아이는 수능 잘 못 보게 해 주십시오”하는 이기적 욕심이 내포되어 있다고 비판해왔던 것이다. 그런 내가 똑같은 기도를 하는 것은 스스로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기적 욕심 담기보다
노력한 만큼 돌려받는
진정한 평등 발원하자


아무 생각 없이 절만 한다는 것도 정직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무심하고 무욕한 존재가 아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내 아들이 좋은 성적을 받기를 원한다. 내가 부정해도 부처님은 내 마음을 뻔히 아실 터이므로 거짓 기도를 드릴 수는 없었다. 절의 숫자가 오십이 넘어가면서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참으로 옹졸하고 치사한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절을 하면서 숫자를 세고, 절하는 이유를 따지는 나 자신이 문득 부끄러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절은 쉬지 않았고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아내가 늘 말하기를, 둘째 아이는 겉으로 강한 척해도 마음이 여리고 약해 큰 시험이 닥치면 긴장을 한단다. 문득 그 말이 기억나, “제 아들, 그저 제 실력대로만 시험 보게 해주십시오.”라며 절을 했다. 그러자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시험성적이란 게 원래 제 실력대로 나오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온갖 핑계로 사실을 호도한다. 어떤 애는 찍은 답이 운 좋게 맞았는데, 우리 애는 하필이면 문제를 착각해 점수가 낮아졌다며 남의 탓을 한다. 절이 계속되면서 내 기도는 자연스레 “내 자식을 비롯한 모든 수험생이 제 실력대로 성적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답을 밀려 표기해 시험을 망치는 아이도, 남의 답을 슬쩍 훔쳐보아 1, 2점을 더 맞는 아이도 없이 모든 수험생이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깜냥에 합당한 점수를 얻으면 되는 거였다.

그러는 사이 내 백팔배는 끝났다. 하지만 대웅보전에서 시작된 아내의 기도는 응진전, 삼신각으로 이어졌다. 아내의 절이 끝날 때까지 나는 경내를 거닐며 모처럼의 가을산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선혈 같은 홍엽은 아니지만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단장한 고령산은 무척 아름다웠다.

시험날짜가 다가와서인지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고 신종플루도 극성을 부린다. 수험생을 둔 부모는 걱정이 한 가지 더 는 셈이다. 내 기도에도 한 가지 내용이 추가될 수밖에 없다. 내주 목요일까지 모든 수험생이 건강하길 바란다. 그리고 모든 수험생이 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스스로 만족할만한 점수를 받았으면 좋겠다. 열심히 노력하고 능력껏 실력을 인정받는 것, 그게 진정한 평등 아니겠는가.

장 영 우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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