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  정산 총무원장

불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커다란 장맛비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큰 피해를 안겨 주고 있습니다. 마치 서민들의 삶엔 아랑곳 않고 ‘맛 좀 봐라’하는 식으로 물줄기를 퍼붓는 것 같아 원망스런 눈길로 하늘만 바라볼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예기치 못하게 피해를 입게 될 경우 자연과의 소통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자연과 환경파괴란 인간들의 이기심이 ‘친화’를 간과하고 나아가 소통의 기능을 무시한 채 자연을 지배하려는데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현하 우리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 병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온라인을 통해서도 매일같이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나와 생각이 다른 이는 무조건 적대적으로 대하는 네티즌들, 이념으로 갈라서서 언쟁을 높이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소통 부재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사회, 소통합시다’라는 슬로건이 등장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21일 동국대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참여하여 한국사회가 소통에 실패하는 원인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세미나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불자 여러분! 곰곰이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처럼 하나의 언어를 쓰며 하나의 핏줄로 이어지고 있는 단일민족은 흔치 않습니다. 더욱이 문화와 생활방식이 다른 광활한 국토를 가진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고 작은 나라에서 소통의 부재라니 선뜻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소통의 부재상황을 해소하려는데 이렇다 할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략적으로 이용하거나 즐기려는 측면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종교의 대사회적 자정 역할이 보다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현시대에 국민들이 불화와 고통을 겪고 있고 상생의 접합점이 보이지 않는다면 종교인의 책임도 크다 할 것입니다.

신라시대 원효성사는 ‘아미타불’을 통해 현세의 절망에 젖어있는 민중들을 계도했습니다. 또한 진묵대사는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무애도인의 선기로 희망과 즐거움을 선사하려 노력했습니다.
오늘날 소통부재의 상황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자기 주장만 옳다고 우겨대는 편파주의에서 비롯되지는 않았는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누구든 가차 없이 매도하는 상대경시 풍조에서 온 것은 아닌지 냉정히 성찰해 볼 일입니다.

소통 부재라 함은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대화가 없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단절이며 인간 고리의 관계를 부정하는 행태입니다. 글로벌 시대에 있어서 이 같은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종교의 책무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 불교에는 이를 풀어나갈 수 있는 훌륭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도(中道)사상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중도를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입장’이라고 쉽게 해석하지만 중도를 정확히 설명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부처님의 전법과정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성취하신 후 왜 바라나시를 전법의 주요거점으로 삼으셨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바라나시는 인도 전역의 자유사상가들이 운집해 있던 곳입니다. 그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산자야파 등 육사외도가 그 대표적인 것인데, 부처님은 이들을 하나하나 설복해 나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짧은 시간 내에 가장 큰 교단을 형성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세계 사상사가 그렇듯이 당시 육사외도의 제파들도 쾌락 혹은 회의라는 양극단에 빠져 있었는데 이를 부처님이 중도라는 가르침으로 그들의 잘못된 견해와 주장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중도가 어떤 내용이길래 그들은 부처님께 조복당했을까요? ‘제 논리에 집착하면 그 자리가 바로 모순이 된다’는 부처님의 설파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는 자유사상가들을 상대로 한 부처님의 적극적인 전법행위이며, 둘째는 그들의 갈등관계를 풀어 평화와 행복을 가르치는 교단의 구성원으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의 소통부재에 대해 많은 이들이 우려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박제화된 화두처럼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중도사상으로 계층과 세대, 지역 간의 소통부재를 불자들이 앞장서 풀어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 봅니다. 판단과 선택에 있어서 중도만큼 지혜롭게 만들어주는 가르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난제도 풀어낼 수 있는 최상의 비책이 중도에 있음을 우리 불자들은 알아야 합니다.
모순 상극의 차별화된 세계를 벗을 때 참진리가 드러난다는 가르침이 중도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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