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경제를 뒤흔든 ‘금융 쓰나미’로 158년의 역사를 자랑했던 리먼브러더스가 몰락하자,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 로버트 새뮤얼슨은 “월가는 지금 공포와 탐욕의 무게에 눌려 붕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첨단 금융공학이라고 자랑해 온 선진 금융기법과 파생상품은 결국 자신을 파국으로 인도한 덫이 된 셈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여파가 전 세계에 걸쳐 사태발생에 책임이 없는 사람들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지금 세계는 소수의 탐욕이 죄 없는 다수의 삶을 파괴시키는 현장이다. 한국은 이미 경험한 두 차례의 경제위기가 채 원상복구도 되기도 전에 또 글로벌 금융위기가 내습했다. 1997년의 외환위기와 2004년 신용대란을 겪으면서 이 땅의 중산층은 점점 몰락해 갔다. 먼저 닥친 광풍으로 삶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린 사람들이 간신히 재기를 꿈꿀 만할 때, 더 큰 광풍이 몰아쳐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형국의 반복이다.

외환위기 이후 11년간은 한국의 중하위계층이 워킹푸어로 몰락해 가는 과정이었다. 대량 실업이 발생하고, 이들이 영세자영업자나 일용직·계약직 노동자로 전락되었다가 신용대란 이후 더 큰 위기를 맞았다. 이후 소위 말하는 ‘좋은 일자리’는 빠르게 줄어들고, ‘나쁜 일자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부부가 모두 나쁜 일자리를 가진 경우 어느 한쪽이 실직하거나 아프면 곧 바로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로 떨어진다. 계산상 한 번 이 나락으로 떨어지면 그 굴레를 벗어날 길이 없어진다.

‘큰 부자는 하늘이 내지만,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이 만든다.’는 속담이 있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큰 부자는 못돼도 먹고 사는 일은 해결된다는 의미의 이 속담은 이제 그 효용이 다했다. 근면과 성실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권장해 온 우리의 상식을 무색케 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저축이 불가능한 ‘제로 혹은 마이너스인생’ 즉,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워킹푸어가 출현한 것이다.

근면만으로 살 수 없는
‘탐욕’ 확장의 시대
불교적 해법 찾아야


자본주의는 이기심의 부추김과 욕망확장시스템으로 유지되는 사회이다. 따라서 위기는 주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일이고, 위기 때마다 처방은 탐욕을 더욱 부추기는 땜질식 처방으로 모면해 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필자가 정말로 신기하게 느껴지는 두 가지 일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많은 경제학자와 사회사상가들은 문제의 핵심이 제도나 법률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해결의 출발점을 찾는 이론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탐욕은 인간의 본성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것의 해결은 종교나 철학의 문제이지 사회과학의 접근대상이 아니라는 자포자기 현상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또 한 가지는 불자라고하면, 탐욕이 모든 인간문제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그 많은 불교도(학자, 정치가, 사업가 등등) 중에서 어느 누구도 이 아수라적인 상황의 해결을 위하여 탐욕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을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로 활용해 보려는 시도조차 해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도가 염원하는 불국토란 어떤 국토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자문해 보게 된다. 결국 우리의 신념체계는 종교적 울타리 안에서만 기능하는 것인가? 예토를 넘어 정토를 구현하겠다는 불교도들의 원대한 서원은 결국 종교적 수사학에 불과한 것인가?

/윤세원 인천전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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