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존엄사를 인정한 대법원 판결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존엄사 집행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있다. 되돌아보면 1970년대 미국에서 의식불명의 카렌 퀸란에 대한 존엄사 논란이 있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한 부모에게 당시 미국의 대법원도 존엄사를 인정해 주었으니 한국은 미국보다 약 30년 늦게 받아들인 셈이다.

존엄사에도 적극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형태와 불필요한 치료나 연명기구를 거부하는 소극적 형태가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존엄사는 인간이 죽음을 선택하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런 죽음으로 보이기 때문에 생명은 소중하다는 일반적 관점뿐만 아니라 생명 존중의 종교적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무엇보다 생명의 존귀함을 가르치는 불교 역시 어떤 유형의 안락사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행위를 옳지 않다고 보는 불교 입장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는 분명 교리와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가에서 굳이 고승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이 드신 노스님들께서 곡기를 끊거나 과도한 병원치료를 거부하고 자신의 절에서 담담히 열반에 드시는 경우를 본다. 이를 대부분의 스님들이나 불자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면 불교계로서는 현재 일반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존엄사를 단지 외형적으로 인간이 목숨을 끊는 것이기에 반대한다는 단순 논리 외에 또 다른 시각도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초기불교 관점
존엄사 위배 안돼
호스피스 문화 확립해야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선택된 죽음이기에 존엄사를 부정해야 한다면, 이는 거꾸로 우리들이 너무 인위적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기에 발생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태어난 모든 것은 반드시 죽는다. 생명체가 죽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일이자 범사(凡事)다. 생각해 보면 현대의학이라는 인위적 수단에 의지해서 오래 살려고 하는 행위야말로 죽음을 피하려는 부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닐까.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옳지 않다고 본다면 과도하게 생에 집착하는 행위도 결코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니며 모든 상(相)에 대한 집착을 놓으라는 가르침은 생에 대한 소중함이나 존귀함이 집착을 의미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존엄사는 죽음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인간들의 인위적 행위를 스스로 거부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 의해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집착을 동반한 우리들의 인위적 행위는 그것이 사는 쪽이건 죽는 쪽이건 업(業)이라 불리는 망상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같은 죽음의 선택이라도 곡기를 끊은 노스님들의 담담한 열반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자포자기나 현실도피의 자살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면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행위를 부정한 초기불교의 관점은 인위적 수단으로 집착을 부정한 현대사회의 존엄사에 위배되지 않는다. 산다, 죽는다는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으로서 얼마나 당당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불교의 가르침도 이와 같다. 따라서 존엄사가 단순히 시대적 요청이라는 면을 떠나 앞으로 불교계는 치열하고도 다양한 논의와 성찰을 통해 존엄사를 수용해야 하며, 또한 존엄사를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제도와 호스피스 문화의 확립이야말로 존엄사에 대한 교리적 찬반논쟁보다 더욱 절실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 희 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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