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  춘 광 감사원장

불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종교인이라서 그런지 누가 잘못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저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양 가슴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됐든, 소외계층의 인물이든 상관없이 그들이 겪어야 하는 아픔을 왜 불교가 지켜주지 못 했는가 자책합니다.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이 있고, 대의왕 약사여래가 있으며,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지장보살이 있는데 우리 중생들의 아픔이 왜 이렇게 계속되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던 중 답안을 찾아낸 것은 다음과 같은 화제를 듣고 나서였습니다.

며칠 전 미국 전역에 장애인 고등학교를 확산시킨 주역 중 하나인 태프트 대학의 제프로스 교수가 일행들과 함께 방한하였습니다. 제프로스 교수는 태프트 대학에 지적 장애와 자폐를 포함한 발달 장애인들이 2년 간 직업교육을 받는 프로그램을 제안하여 정착시킨 분입니다. 1995년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장애인 고등교육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금도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제프로스 교수는 처음 이 프로그램을 도입할 때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이 아이들을 과잉보호하는데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조금만 도와주면 충분히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컴퓨터 사용하기’ ‘전화받기’ ‘서류 정리하기’ ‘음식 만드는 법’ ‘세탁 하는 법’ ‘은행 가는 법’ ‘아파트 구하는 법’까지 2년 간 38개 과목을 공부시키는 커리큘럼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38개 과목은 모두 실생활에 응용되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의 효과는 주효했습니다. 졸업생의 92%가 직업을 가지고 있고 95%가 부모로부터 독립해 혼자 살고 있다고 학교 관계자는 밝혔습니다.

제프로스 교수와 태프트 대학은 장애인을 늘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2년의 교육과정을 통해 ‘홀로서기’가 가능한 존재로 파악했던 것입니다. 태프트 대학이 장애인 고등교육으로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실제로 장애인들에게 맞는 실생활의 눈높이 교육을 개발했고 이것이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성과없는 교육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 불교는 8만4천의 광대무변한 진리를 담고 있는 가르침이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상대방의 가슴을 적시지 못하는 ‘뜬 구름’에 지나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책 속의 진리에 머물고 맙니다. 다시 말해 8만4천의 법문은 대장경에만 새겨둘 것이 아니라 중생의 실생활에 적용돼야 합니다.

하지만 8만4천 법문이 누구나 다 알아야 할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고승이라, 뛰어난 천재 학자라도 8만4천 법문을 다 기억해 내기란 어렵습니다. 또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경전이란 것도 알고 보면 부처님 재세 시 그때그때 중생을 교화할 때 말씀하신 내용을 결집한 것의 모음입니다.

경전의 내용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눈높이 교육이라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세분화하고 전문화할 때 정말로 잘사는 법을 사람들이 적시에 배우게 됩니다. 대학 강단에 서는 교수들도 삶의 문제에 있어서는 부처님의 법을 듣기를 갈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으로 읽는 법문은 가슴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수행자들의 삶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부처님을 닮고자 정진하는 수행자들의 삶과 생각을 들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나태를 경계하고 참된 인생의 지표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합니다.

이와 관련된 예화도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중국 북송 때의 제1 문장가로 유명한 소동파는 자신의 재주만 믿고 허세를 부린 적이 있습니다. 스님들도 다 자기 아래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옥천사의 승호선사를 찾아가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승호선사가 성이 무엇이냐고 묻자 ‘칭가’라고 답했습니다. 칭[秤]은 물건의 무게를 재는 저울을 일컬음이니 자신이야말로 스님들의 법기를 재는 인물로 과시했던 것입니다. 이에 승호선사가 ‘할’을 했습니다.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지르고 이것이 몇 근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소동파는 아무 대답을 못했습니다. 눈높이 교육이란 이런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자만이 어떻고 교만이 어떻고 질책해봐야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에게 도덕과 윤리가 수반된 경전 가르침은 귀에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겐 현실의 경제적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는 가르침을 전해줘야 귀를 쫑긋 세울 것입니다. 어린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을 주제로 한 현학적인 얘기는 어린이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합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잘 사는 법은 신분과 계층, 세대에 따라 세분화하고 전문화하여 눈높이에 맞는 교육으로 진행돼야 합니다. 그것이 불교의 현대화 슬로건에도 합당한 우리 불자들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이 같은 눈높이 교육을 고대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계의 각 분야별로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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