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3일, 여주 신륵사에는 하나의 비가 제막되었다. 인류화합공생기원비가 그것이다.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와 일한불교교류협의회가 주최한 제30회 한일불교문화교류대회의 일환으로 신륵사세계평화기원대법회를 봉행하고 이 비의 제막식을 가졌던 것이다. 신륵사사적비 옆에 나란히 세워진 높이 3m의 이 비에는 일본에 불교를 전해 준 한국에 대한 감사와 인류화합을 염원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지만, 역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일본이 우리 한국민에게 저질렀던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는 대목이다.

“오랜 세월 간에는 불행한 일이 여러 번 있었고, 특히 근세에 있어서는 일본이 한국민에게 다대한 고통을 끼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반성과 참회의 염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죽어간 자의 위령공양과 민생애호의 심정을 바치면서 밝은 내일을 맹서하는 바입니다.”

일본불교계의 제안에 의해 세워진 이 비에 과거사 참회의 내용을 담은 것은 의미가 있다. 일본의 미야바야시 쇼겐 회장의 말처럼 정치적으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양국의 불교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줄 수 있다면 그 의미는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참회한다고 과거의 죄악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하나의 비가 면죄부가 되지는 못한다. 그래도 참회는 중요하다. 잘못의 되풀이를 막아주기 때문에.
일찍이 백제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우리의 많은 불교문화가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은 우리에게 수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특히 한국불교가 당한 피해는 잊을 수가 없고, 쉽게 잊어서도 안 된다. 1593년 5월 왜병은 불국사에 불을 질렀다. 화엄사도 이 해에 잿더미로 화했다. 정유재란의 왜병은 법천사와 법주사를 불태웠다. 정유년 8월 왜적은 만복사의 오백나한을 녹여서 그 동철을 싣고 갔다. 왜군은 흥법사 터에 있던 진공대사비를 둘로 나누어 반절을 가져갔다. 어디 이 뿐이랴. 수행에 전념해야 할 승려들까지도 칼을 들고 나라를 지켜야 했던 아픔도 있었으니. 1938년 10월. 환경, 고경 등 해인사 승려 10여명이 합천경찰서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했다. 불교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만당과 연루되었다
는 이유로. 이때 합천경찰서장 다께우라는 홍제암의 사명대사비를 파괴하고 영정도 훼손했다.

日 백제불교 배우고도
한국 불교문화재 약탈
악업소멸 위해 참회 필요

일본불교계의 대표자들은 나눔의 집을 찾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불국사에 불을 놓고 사명대사비를 깨뜨렸던 죄업을. 과거의 상처를 새삼스레 들출 필요야 없지만, 역사를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악업은 역사의 짐과 굴레가 되고, 업장이 되어 앞길을 막는다. 과거 잘못의 반성과 참회는 필요하다. “모든 악업의 장애는 참회로써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던 원효의 말을 새기지 않더라도. 참회한다고 과거의 악업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이에 대해 원효는 말했다. “전에 있던 죄는 참회로 미칠 바가 아니다. 그것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나타나지 못하게 할 뿐이다. 전의 죄를 참회한다는 것은 종자의 왕성한 작용을 현재까지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과거 잘못의 참회는 분명 의미 있다. 과거에 지은 죄악이 오늘 우리들의 삶에까지 범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역사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도 참회는 필요하다.

김 상 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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